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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오늘] ‘단장의 미아리 고개’… 남한도 외면한 납북 인사들의 비극

중앙일보 2010.06.28 00:02 종합 33면 지면보기
 
  ‘미아리 눈물고개 님이 넘던 이별고개/ 화약연기 앞을 가려 눈 못 뜨고 헤 매일 때/ 당신은 철사 줄로 두 손 꽁꽁 묶인 채로/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맨발로 절며절며/ 끌려가신 이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 고개’(반야월 작사, 1956). 1950년 6월에서 9월 사이 특히 9·28 서울 수복 직전 수많은 이 땅의 시민들이 창자를 끊어내는 고통 속에 미아리 고개를 넘어 북으로 끌려갔다. [사진출처 : 국가기록원]
 
“부족한 인텔리 문제를 해결하자면, 북조선에 있는 인텔리를 다 찾아내는 한편, 남조선에 있는 인텔리를 데려와야 합니다’(‘남조선에서 인텔리들을 데려올 데 대하여’, 1946. 7. 31, 『김일성선집』4). 6·25전쟁 시 이 땅의 지식인과 각계각층의 시민 10만여 명이 북으로 끌려갔다. “자유여 그대는 불사조/ 우리는 조국의 강산을 뒤에 두고/ 홍염만장(紅焰萬丈) 철의 장막 속/ 죽음의 지옥으로 끌려가노라/ 조국이여 유엔이여/ 지옥으로 가는 우리를/ 구출하여 준다는 것은/ 우리의 신념이다.”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 직전 ‘단장(斷腸)의 미아리 고개’를 넘어 북으로 끌려가 평양형무소에 갇혀 있던 한 납북 시민은 구원의 손길이 오리라는 믿음이 담긴 시구(詩句)를 감옥 안벽에 새겼다.

그러나 국가나 유엔은 답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경악하고 한편으로는 커다란 희망을 가지는 바는 다름이 아니라 6·25 당시 납치되어 간 외국인 선교사 외교단원 및 외국시민의 반환을 휴전회담 중에 요구한 것이었습니다. 이 요구는 정의와 인도의 상징인 유엔의 위대하고 고매한 정신이 아닐 수 없으며 또 저희들이 높이 찬양하는 바입니다. 그렇다면 같은 시간에 같은 입장에 같은 환경에서 오직 자유를 위하여 거창한 사업의 도중에 납치된 우리들 조국의 지도자도 여기에 곁들여 요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휴전회담이 한창이던 1951년 12월 ‘6·25사변 피납치 인사 가족회’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청원서에 담긴 절절한 바람은 대답 없는 메아리가 되고 말았다. 납북 시민들의 존재는 망각의 강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개개인의 인권과 자유가 보장되는 시민사회가 도래한 오늘에도 납북 인사들이 이 땅의 시민이었음을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상실증이 만연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난 지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가족들의 기억 속에 그들은 여전히 살아 숨쉰다. “아버님께서 잘 아시는 민족시인 김소월은 이렇게 노래했지요.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저는 오랜 세월 기다림에 지쳐 버렸지만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이 생명 다하기 전에 아버님 마지막 모습, 유골 아닌 영혼이라도 만나고 싶습니다. 목이 메도록 부르고 싶은 아버지의 이름, 고난 속에 더욱 당당하셨던 그 모습을 저희 가족들은 잊지 않을 것입니다.” 납북된 엄친을 그리워하는 절절한 마음이 담긴 부치지 못한 편지의 한 구절은 읽는 이의 마음을 울린다. 자국민 보호의 의무를 저버린 국가와 우리 이웃의 고통에 눈감은 시민사회는 성찰이 필요하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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