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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물러서면 나를 쏴라’권총을 빼든 사단장이 달려가며 외쳤다

중앙일보 2010.06.25 20:13 종합 26면 지면보기
1950년 10월 10일 백선엽 장군이 이끈 국군 1사단이 북한군의 치열한 저항을 뚫고 미 1기병사단에 한 발 앞서 평양에 입성했다. 사진은 백 장군이 시가전을 앞두고 대동강 변에서 미 1기병사단장인 게이 소장과 함께 작전을 협의하는 모습. [중앙포토]
올해는 6·25 전쟁이 일어난 지 6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아직도 전쟁의 성격과 원인을 두고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이 참혹한 전쟁이 우리 민족에 크나큰 상처를 남기고, 한편으로는 한국 현대사회를 형성하는 데 주요 변인이 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때맞춰 6·25 전쟁과 관련된 책들이 쏟아졌습니다. 참전군인의 육성, 대중가요를 통해 그날을 돌아보는 책을 골랐습니다.


본지 연재 글 묶은 백선엽 장군 회고록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

 백선엽 지음

중앙일보사

448쪽, 2만원




1950년 8월. 북한군의 침략으로 남으로 밀린 국군은 낙동강에 최후의 방어선을 쳤다. 경북 칠곡군 다부동에서다. 적은 대한민국을 지도에서 지우기 위해 총력공세를 벌였다. 국군은 대한민국을 지켜내기 위해 처절한 전투를 벌였다. 말 그대로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피가 바다처럼 흘렀다. 역부족이었을까. 국군은 여기저기에서 밀렸다. 미군도 더는 지원할 수 없다고 아우성이었다.



국군 1사단장 백선엽 장군은 지휘소를 나와 전투가 벌어지는 최전방으로 향했다. 순간 포탄이 곁에 떨어졌다. 운전병의 어깨가 찢어져 피범벅이 됐다. 엎친 데 덮친 상황 속에서 백 장군은 고지에서 밀려 내려오던 수백 명의 부하와 마주쳤다. 그는 외쳤다.



“이제 우리는 물러설 곳이 없다. 여기서 밀린다면 우리는 바다에 빠져야 한다. 우리가 밀리면 미군도 철수한다. 그러면 대한민국은 끝이다. 내가 앞장서겠다. 내가 두려움에 물러서면 너희가 나를 쏴라. 나를 믿고 앞으로 나가서 싸우자.”



권총을 빼어든 백 장군이 앞으로 달려나갔다. 부하들이 뒤를 따랐다. 고지는 다시 아군 손에 들어왔다. 이 책의 제목이 된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는 말이 나온 바로 그 순간의 기록이다.



이 책은 6·25전쟁에서 사단장부터 육군참모총장까지 국군의 핵심 직책을 맡으면서 일선에서 싸움을 이끌었던 백선엽 예비역 대장의 전쟁 기록이다. 중앙일보에 올해 1월부터 연재하고 있는 ‘남기고 싶은 이야기-내가 겪은 6·25와 대한민국’의 앞 부분을 묶어 한 권으로 펴냈다.



백 장군의 증언은 지금까지 많은 사람이 믿고 있던 6·25전쟁의 ‘자학사관’을 일거에 씻어낸다. 개전 초 병력과 무기에서 열세였던 국군이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에 마구 밀려났다는 시각이 그 가운데 하나다. 백 장군에 따르면 국군은 개전 초 임진강 전선에서 다양한 형태의 효과적인 공격으로 북한의 T-34 전차에 대처했다. 게다가 후퇴도 부대의 건제를 상당히 유지하면서 질서 있게 이뤄졌다는 게 백 장군의 증언이다. 작전용어로 말하면 ‘반격을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 공간을 내줬다’는 설명이다. 이는 낙동강 방어전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증명된다. 후퇴 과정에서도 6사단 7연대가 충북 충주 인근 동락리 전투에서 북한군 1개 연대를 섬멸하는 등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군이 후퇴 중에도 희망이나 전의를 상실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경북 상주에 도착한 육군 1사단은 소문을 듣고 소속부대를 찾아온 부대원으로 가득했다. 모두 나라를 지키고 반격을 하겠다는 의지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런 높은 사기는 나라를 지키고 반격을 이뤄낸 원동력의 하나다. 6·25는 연합군과 중공군이 참전해 국제절서에도 큰 영향을 준 국제전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대한민국 국민이 우리 손으로 치러낸 우리의 전쟁이기도 하다는 점을 백 장군은 강조하고 있다.



이 책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있다면 백 장군의 묵직한 리더십이다. 그는 전쟁 초기 임진강에서, 그리고 북진 도중 평안북도 운산에서 각각 북한군과 중공군의 기습으로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 전장에서 누구보다 험한 일을 많이 겪었다. 그럼에도, 괜한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묵묵히 부하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곤 깊은 고뇌를 거쳐 결단한 뒤에는 불도저처럼 밀고 나갔다. 소통과 결단의 리더십이다. 북진 과정에서 미군을 제치고 평양 입성 1호를 이룬 건 이런 리더십의 결과였다.



여기에는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키는 신뢰의 리더십도 포함된다. 이는 미군과의 연합작전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아니 필수적이었다. 그는 낙동강 전선에서 처음으로 미군을 휘하에 배속받아 함께 작전을 펼친 것을 시작으로 전쟁 내내 한미 연합작전의 선봉에 섰다. 한미동맹의 실질적인 초석을 다진 것이다. 여기에는 연합군과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킨다는 그의 리더십이 크게 작용했다. 동맹이란 이런 신뢰 아래 다져진다는 것을 그의 증언은 강조하고 있다.



이 책은 전쟁에 참전했던 미군 지휘관들의 면면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과 월튼 워커, 매슈 리지웨이, 제임스 밴플리트 등 역대 미군 사령관의 성격과 지휘 방식을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아울러 백 장군이 멘토로 여겼던 프랭크 밀번 미 1군단장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용맹과 함께 세밀한 부대 관리, 그리고 창의적인 작전을 중시했던 밀번의 특징은 고스란히 백 장군의 지휘 철학으로 이어졌다. 미군 명장들에 대한 이러한 기록은 한미동맹의 역사를 기록하는 소중한 사료다.



백 장군은 이 책에서 ‘나라는 스스로 지켜야 한다’ ‘친구는 스스로 지키려는 사람만 도운다’는 점을 유난히 강조한다. 남의 도움만으론 절대 나라를 지킬 수 없다는 소리다. 물론 6·25전쟁에서 연합군의 지원은 결정적인 도움이 된 게 사실이다. 하지만 국군이 용기와 함께 이기고자 하는 의지, 그리고 희생과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줬기에 연합군이 도와준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한반도를 포기했을 것이라는 게 백 장군의 생각이다.



많은 젊은이가 6·25전쟁의 실상을 알고 미래를 대비하게 하기 위해 이 책을 펴냈다는 백 장군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유다.



채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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