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6·25 최전선 누빈 백선엽 장군이 말하는 ‘전쟁과 평화’

중앙일보 2010.06.25 00:26 종합 24면 지면보기
백선엽 장군의 이름을 처음 들은 건 삼십 몇 년 전 초등학생 때였다. 직업 군인이던 선친은 종종 6·25전쟁의 영웅 백 장군 얘기를 입에 올렸다. 그 이름이 지금까지도 뚜렷이 각인돼 있는 걸 보면 아마 한두 번 들은 게 아니었던 것 같다. 해서 백 장군을 인터뷰하러 갈 때 마음이 설렜다. 직속 상관은 아니었겠지만 어쨌든 계급상 선친의 한참 상관이었을 장군을 기자가 된 그의 아들이 만나러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아마 그런 아들을 기꺼워하셨으리라.


“대한민국 땅 단 1인치도 거저 얻은 것 없어 … 자유는 절대로 공짜가 아니다”

올해로 90세인 백 장군은 정정하다는 표현의 모델 케이스 같았다. 건강 비결을 물었더니 세 가지를 말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난다. 술 담배를 안 한다. 열심히 일한다. 특히 6·25전쟁에 대한 그의 기억력은 경이로울 정도였다. 몇 월 며칠에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장면 묘사는 너무나 생생하고 세밀해 눈을 감고 듣고 있으면 그 전쟁터 속에 끌려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함께 취재 간 후배 기자는 “6·25에 대해 내가 아는 게 거의 없다는 걸 깨닫게 됐다”고 당황스레 말했다. 전쟁기념관 안에 있는 백 장군 사무실은 그 자체로 역사 박물관 같았다. 1950년대의 이승만·아이젠하워 대통령에서부터 현재의 미 국방장관 로버트 게이츠까지 그가 만난 수많은 인물 사진들이 벽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잊혀진 전쟁’이었던 6·25가 60주년을 맞아 역사 속에서 제자리를 찾길 염원했다.



인터뷰가 끝난 뒤 백 장군에게 선친 얘기를 했다. 장군은 기뻐했다. 헤어지기 전에 백 장군에게 선친을 대신해 거수경례를 했다. 좀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러고 싶었다. 악수를 하려고 손을 내밀던 장군은 일순 당황하는 표정이었다. 그래도 기꺼이 맞경례를 하면서 받아주었다. 노(老)장군의 입가에 얼핏 미소가 스쳤다.



6·25, 그날의 회상



백선엽 장군이 24일 전쟁기념관 안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우리를 도와 준 우방국 들의 은혜를 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오종택 기자]
-6·25 전쟁이 터진 지 정확히 60년입니다.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시죠.



“그날 아침 비가 내렸어요. 나는 당시 임진강에 있던 1사단장이었는데 시흥 보병학교에서 학생 신분으로 공부를 하고 있었어. 아침 7시쯤에 사단 작전참모로 부터 북한군이 새벽 4시에 열차 타고 개성에 들어왔다고 연락이 온 거야. 지나가던 지프를 얻어 타고 육군본부가 있던 용산으로 뛰어갔어요. 채병덕 장군한테 부대에 복귀한다고 보고하고 근처에 살던 미 고문단 라크웰 중령 집에 가서 문을 두드리면서 전쟁 났다니까 깜짝 놀라더라고.”



-아비규환이었겠네요.



“그랬지. 라크웰 중령 지프로 남대문 살던 최경록 대령을 태워서 임진강 철교로 갔어요. 거기서 12연대 미 고문관 다리코 대위를 만났는데 맨발이더라고. 이 사람이 (개성) 송악산 뒤에 있던 자기 집에서 지프를 몰고 간신히 탈출한 거야.”



-공격을 전혀 예상 못했나요.



“북한이 소련 스탈린으로부터 전차와 전투기를 받았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공격할 줄은 몰랐지. 북한은 20개 사단에다 20만 명의 군대가 있었는데, 우리 군은 9만 명이었고. 전차 한 대 없고 항공기도 없고 무기는 M-3포 90문 있는 게 전부였어요.”



-하지만 북침을 주장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습니다.



“(웃으며) 그게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의정부쪽이 전쟁 이틀 만에 뚫려서 미아리에서 2개 사단을 증파해 육탄으로 막았지만 소용 없었어요. 그래서 사흘 만에 서울이 떨어진 거예요. 북침을 했으면 그렇게 됐겠어요.”



-당시 장군님 부대는 파주 봉일천에 있었지요?



“26일 밤에 봉일천으로 후퇴해 방어하면서 28일 아침에 군수참모에게 부천 탄약고에서 탄약을 받아오라고 시켰어요. 그런데 중간에 돌아와서 하는 말이 어젯밤 서울이 함락됐고 서대문 형무소가 개방됐다는 거야. 서울시내는 인공기가 휘날리고 적기가를 부르고 있다는 거지. 부대를 행주나루로 이동시켜 시흥으로 후퇴하면서 부하들한테 말했어요. 우리가 시흥에서도 무너지면 지리산에 들어가 게릴라 활동을 해야 한다고.”



-가장 기억에 남는 전투가 뭡니까.



“8월에 대구 근처 다부동에서 벌어졌던 전투지요. 낙동강을 방어해서 북진의 토대를 만들었으니까. 적 3개 사단이 우리를 완전히 포위했어요. 별명이 불독인 워커 장군이 전차와 대포를 갖춘 미군 27연대를 보내줬어. 거기서 6·25 전쟁 최초로 한·미 합동 군사작전을 벌인 거죠. 워커 장군은 12월에 한국군 트럭과 부딪쳐서 사망했어요. 엊그제 미 8군 영내에 워커 장군 동상 건립식이 있었는데 참 좋습디다. 만일 그때 다부동이 뚫렸으면 한국은 북한 손에 떨어졌을 거요. 대한민국 땅 단 1인치도 거저 얻은 게 없습니다.”



-후회스러운 전투도 있을 텐데요.



“맥아더 장군이 인천 상륙하고 열흘 동안 미 7사단과 해군 17연대, 국군 해병연대가 서울을 재탈환했어요. 내가 지휘하던 1사단은 미군보다 평양에 먼저 도착했고. 한데 청천강 넘어 운산에서 중공군과 부닥쳤지. 북진하던 국군 4개 사단 중 3개 사단이 깨졌어요. 6사단은 초산에서, 8사단은 덕천, 7사단은 영월에서 중공군에 녹았어. 미군도 2사단의 3분의 1이 없어졌고. 조금만 더 올라갔으면 통일인데 중공군에 밀려 내려온 게 제일 안타까워요.”



-수많은 미국 장군과 함께 전쟁을 치렀는데 그중에서 누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까.



“아무래도 맥아더죠. 대전략가예요. 한국전쟁이 터지자 6월 29일 수원 비행장에 왔어요. 소련 야크기가 공격을 하는데도요. 맥아더가 영등포 제방 둑에 서서 전선을 본 뒤 한국을 구하려면 빨리 미군이 개입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트루먼 대통령에게 얘기한 거죠. 또 인천 상륙은 역사에 남을 작전 아닙니까.”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만나 한·미동맹을 담판하셨다죠.



“53년 5월 미국에 가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만났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북진통일한다는데 우린 휴전해야겠다’는 거예요. 해서 우리한테 개런티를 달라고 했어요. 그게 뭐냐기에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맺어달라고 졸랐죠. 그랬더니 ‘In principle, I agree with you(원칙적으로 동의한다)’라는 거예요. 한데 상원 비준을 받아야 한다고 해요. 그런 와중에 이승만 대통령이 반공포로를 석방하는 바람에 난리가 나기도 했지만 결국 ▶한·미 방위조약을 체결하고 ▶한국에 10억 달러를 지원하고 ▶한국군을 계속 지원하고 ▶한국은 휴전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서로 합의해서 한·미동맹이 시작된 거죠.”



전쟁과 리더십



6·25 60년 … 대동강 철교 찍은 97세 종군기자와 나라 지킨 90세 전쟁영웅이 만났다 97세 된 종군 사진작가와 90세 장군은 두 손을 굳게 맞잡았다. 그 사이로 60년의 세월이 흘렀다. 한국전쟁 당시인 1950년 12월, 부서진 대동강 철교를 건너는 피란민 행렬을 찍어 퓰리처상을 받은 AP통신 종군기자 맥스 데스퍼(오른쪽)가 방한해 한국 전쟁 영웅 백선엽 장군을 만났다. 퓰리처상 사진전이 열리고 있는 예술의전당에서다. 데스퍼가 백 장군에게 “60년 전 당신을 만났는데 아직 90세라니 한참 젊다”고 말해 두 사람은 파안대소했다. 맥스 데스퍼가 찍은 사진을 배경으로 두 사람이 만난 장면을 그래픽 처리했다. [사진=김태성 기자], [그래픽= 이혜경]
-6·25 전쟁 때 장군의 1사단은 거의 패배를 모르는 부대로 소문났었는데 도대체 사단장이 어떻게 했기에 그런 결과가 나온 겁니까.



“‘지휘관은 절대 놀라지 않는다(Commander never surprised)’라는 말이 있어요. 지휘관은 항상 긴장을 하면서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준비하고 있어야 해요. 소극적으로 하면 안 돼요. 무조건 선제공격을 하라는 게 아니라 항상 준비를 하면서 적극적으로 임무 달성을 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죠. 부하들의 이견을 최대한 참고하면서요.”



-전쟁터에서의 리더십이 기업이나 학교처럼 상황과 조건이 다른 곳에서도 적용될 수 있을까요.



“본질은 같은 거지요. 기업의 리더십과 마찬가지인 거죠. 우선 지휘관은 근면해야 합니다. ”



-6·25 전쟁은 그동안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군사정부 때는 정권 안보를 위한 반공이데올로기로 악용되기도 했고 이른바 진보정권 때는 아예 외면당하기도 했습니다. 6·25가 어떤 의미가 있다고 보십니까.



“한국은 오랜 역사 동안 숨겨진 나라였어요. 그렇게 알려지지 않았던 나라가 해방이 되면서 남북으로 갈린 거예요. 6·25가 터지고 난 뒤 한국은 미국과 동맹이 됐고 전쟁에 참전한 16개 우방의 도움으로 공산주의의 지배를 받지 않게 됐어요. 전쟁의 아이러니이겠지만 전쟁을 통해 우리는 국제사회에 진입한 겁니다. 이제 우리는 세계 12위의 무역대국이 됐고, 국민소득도 2만 달러에 육박하는 나라가 됐죠. 지금의 한국이 있게 된 것, 한국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은 것, 그것이 바로 그 참혹했던 6·25 전쟁을 통해 우리가 얻어낸 것이죠.”



-1960~70년대 세대는 산업화의 역군으로 평가받습니다. 그러나 1940~50년대 세대는 해방과 전쟁의 격변을 치르고도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데요, 서운하지 않습니까.



“1950년대 세대도 그 나름의 역할을 했어요. 당시 우리는 초근목피(草根木皮: 풀뿌리와 나무껍질)를 벗겨 먹고사는 나라였어요. 그러다 미국하고 유엔 원조 받아서 충주비료, 판유리공장, 문경시멘트 이런 거 시작했고. 그로부터 두 세대가 지났는데 그때 우리가 지켜낸 나라가 이제 이렇게 위대한 나라가 됐으니 그것만으로도 자랑스러워요. ”



-지금의 풍요로움과 젊은 세대의 자유는 바로 1950년대 전쟁터에서 숨진 세대와 전쟁에 참가한 다른 참전국들 덕분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요. 많은 사람이 자유를 위해 죽어갔습니다. 우리 군인들과 국민뿐 아니라 수많은 동맹국의 젊은이가 전혀 알지도 못하는 나라에 와서 죽어갔습니다. 그걸 잊어선 안 됩니다.”



과거 세대 희생 잊지 말아야



백선엽 장군은 6·25전쟁 60년을 맞아 본지에 ‘남기고 싶은 이야기-내가 겪은 6·25와 대한민국’이라는 제목으로 장기 연재를 해오고 있다. 사진은 첫 회인 1월 4일자 10면.
-좀 껄끄러운 질문일지 모르지만 5·16 쿠데타로 박정희 장군은 대통령이 됐고 80년 5·18 이후 전두환 장군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장군님 후배들인데 군인이 정치하는 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쿠데타는 지지하지 않아요. 절대 쿠데타 하면 안 돼요. 하지만 5·16과 12·12, 이런 걸 겪으면서 우리나라 국민들이 많이 느끼고 배워서 민주화가 된 거죠. 이것도 진보라고 저는 생각해요.”



-진보성향의 정부가 들어서면 북한에 대해 온정적 태도를 취하는데 전쟁을 치르신 입장에서 거기에 반대하십니까.



“제가 항상 얘기하는 게 있는데 ‘프리덤 이즈 낫 프리(Freedom is not free)’라는 거예요. 자유는 공짜가 아니라는 거죠. 진보정권이 치적도 있겠지만 친북 좌파세력을 키워 놓은 것은 정말 잘못한 겁니다. 북한은 끝까지 적화통일을 꿈꿔요. 핵무기 개발하고, 미사일 수출하고, 120만 명 군대에 특공대가 20만 명이지. 또 지난 60년간 해온 걸 보세요. 박정희 대통령 암살하려고 청와대에 무장공비 침투시켰지, 버마의 랑군에서 폭탄테러 했지, KAL기 격추시켰지, 동해안에 잠수정 내려보냈지, 이번엔 또 어뢰 쏴서 천안함 침몰시킨 거 아닙니까. 지금까지 북한이 휴전협정을 어긴 게 한두 번이 아니에요.”



-미군과 동맹해 전쟁을 치르셨는데 우리 사회의 반미 분위기는 어떻게 보십니까.



“강력한 동맹이 없으면 절대 전쟁하지 말라는 원칙이 있어요. 세계 초강대국인 미국하고 동맹인 건 우리의 자산인데 그걸 왜 스스로 차버립니까. 전략적으로, 정치적으로 어리석은 짓이죠. 우리가 이 정도 성공할 수 있었던 바탕은 한·미동맹인데 그걸 잊으면 안 되죠. 제발 반미를 정치적으로 악용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우리와 전쟁을 했던 중국은 이제 한국의 최대 교역국이 돼 있습니다.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중국이 아주 약고 잘하는 거죠. 올림픽도 하고, 상해 엑스포도 하고. 이젠 신흥 경제대국이고 미국을 능가하려고 해요. 그런데 북한은 여전히 세계사의 흐름과 동떨어진 채 문을 닫고 폐쇄적인 왕조로 지내고 있으니…. 어쩔 수가 없는 거죠.”



-당시 9만 명이던 국군은 이제 60만 대군이 됐습니다. 국군을 보면서 자랑스러우십니까.



“옛날에는 군인들 절반 이상이 편지를 못 썼어요. 이제는 다 고졸 이상이고 대학생도 많죠. 이 정도 학력은 세계적으로 없어요. 게다가 사관학교 졸업한 사람들이 1만5000명, ROTC가 16만 명, 3사관학교 졸업생이 15만 명이죠. 여러 우여곡절이 있지만 우리 군이 다가올 시대에 잘 적응하리라 믿어요.”



-젊은 세대에게 뭘 전하고 싶습니까.



“젊은이들이 한국전쟁을 잘 모른다고 비관하지 않아요. 벌써 두 세대가 지났잖아. 모르는 게 당연하지. 잘 가르치지 못한 책임이 우리 참전세대한테도 있고.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았어요. 한국전쟁의 진상을 알려야 해요…. 올해가 전쟁이 터진 지 60년인데, 이걸 계기로 젊은 세대가 과거 세대의 희생과 공헌을 되돌아보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되돌아보길 바랍니다. 자유는 공짜가 아닙니다.”



글=김종혁 문화스포츠 에디터, 정선언 기자

사진=오종택·김태성 기자

그래픽=이혜경



※ 사진 혹은 이름을 클릭하시면 상세 프로필을 보실 수 있습니다.[상세정보 유료]
※ 인물의 등장순서는 조인스닷컴 인물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된 순서와 동일합니다.
사진 이름 소속기관 생년
백선엽
(白善燁)
[前] 한국후지쯔 고문
[前] 교통부 장관(제19대)
1920년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