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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lf&] 고 위상규 옹 전우 윤응렬 장군이 주는 이야기

중앙일보 2010.06.25 00:23 경제 21면 지면보기
2010년 6월25일은 6·25 전쟁 발발 60주년이지요. 이번주 golf&은 6·25당시 공군 전투기를 몰고 북한군과 싸웠던 한 노병의 이야기입니다. LPGA투어의 스타 미셸 위의 할아버지도

함께 출격했다는군요. 지금부터 그 사연을 전해드리겠습니다.

미셸 위, 그린 위에서 힘들 때면 전쟁에서 죽을 고비 수없이 넘긴 6·25 때의 네 할아버지를 생각하렴



“이게 한국전쟁 당시 내가 탔던 전투기이고, 이쪽은 바로 미셸 양의 할아버지가 탔던 비행기예요. 지금도 바로 엊그제처럼 기억이 생생하군요.”



노병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손녀뻘인 미셸 위(20)의 손을 꼭 잡고 그림을 보며 차분하게 설명을 해나갔다.



“1953년 3월 26일, 한국전쟁이 막바지였던 때였어요. 나랑 미셸 양의 할아버지는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전투기를 몰고 출격했었지요. 미셸 양의 할아버지는 참 용감한 군인이셨어요.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해서 별명이 불사조였지요. 돌아가시기 전 내게 전화를 걸어 ‘미셸 위가 바로 내 손녀’라고 자랑을 하곤 했는데 지금 이 자리에 안 계시다니 무척 안타깝군요.”



예비역 공군 소장 윤응렬 장군(왼쪽)이 LPGA투어의 수퍼스타 미셸 위에게 6·25당시의 상황을 설명해 주는 장면입니다.
지난 3월 26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칼즈배드의 라코스타 골프장. LPGA투어 KIA클래식 개막을 앞두고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신사가 LPGA투어의 수퍼스타 미셸 위를 찾았다. 노신사의 이름은 윤응렬(84). 1964년 공군사관학교장을 지낸 뒤 70년 공군작전사령관(소장)으로 예편한 예비역 장군이다. 미국 샌디에이고에 거주하는 윤 장군은 이날 미셸 위를 만난 자리에서 2008년 12월 작고한 미셸 위의 할아버지 위상규 옹과의 특별한 인연을 공개했다. 위상규 옹은 우리나라 최초의 항공공학 박사로 2008년 82세의 나이로 작고했다. 그런데 미셸 위는 난데없이 나타난 노신사와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한국전쟁 때 나라를 지키기 위해 함께 싸우던 전우였다는 소리를 듣고 눈이 똥그래졌다.



공군장교 미셸 위 할아버지와의 인연



“이게 그럼 할아버지가 탔던 비행기인가요.”



미셸 위의 질문에 윤 장군은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3월 26일은 이승만 대통령의 생일이었지요. 북한이 눈치를 못 채도록 축하 비행을 한다고 연막을 친 뒤 당시 강원도를 점령하고 있던 북한군 기지를 폭격하러 나섰어요. 그 당시 작전이 성공하지 못했다면 지금 설악산은 북한 땅으로 남아있었을지도 몰라요.”



옆에 있던 미셸 위의 아버지 위병욱(48)씨도 감개가 무량하다는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당시 아버지 계급이 뭐였는지 기억하시나요.”



“기억하고 말고요. 당시 나는 소령으로 편대군장을 맡았고, 미셸의 할아버지는 대위였었죠.”



예비역 공군 소장 윤응렬 옹이 1952년 출격을 마치고 경남 사천 기지로 돌아와 포즈를 취했다.
윤 장군은 차분하게 설명을 마친 뒤 위상규 옹과 함께 찍은 사진과 한국전쟁 당시 전투기 비행 상황을 그대로 묘사한 그림을 미셸 위에게 전달했다.



“이 그림은 나와 위상규 박사가 미국 플로리다주 데이토나비치에 있는 미 공군 전쟁박물관에 기증한 그림입니다. 나와 위 박사는 뜻이 잘 맞았지요. 한 번은 내가 위 박사에게 ‘당신은 체구가 크지 않은데 손녀는 어떻게 그렇게 키가 크냐’고 물어본 적이 있어요. 그랬더니 위 박사는 ‘내 집사람도 키가 크고, 아들·며느리가 다 크다’며 빙긋이 웃더라고요.”



윤 장군은 이날 미셸 위를 만난 뒤에도 골프장을 떠나지 않고 드라이빙 레인지 뒤편에 앉아 미셸 위의 훈련 장면을 1시간이 넘도록 지켜봤다.



“내가 죽기 전에 미셸 양에게 꼭 이 사진과 그림을 전해주고 싶었어요. 할아버지가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었으니 미셸 양도 열심히 운동을 하라고 격려하고 싶었지요.”



맨주먹 참전용사의 취미는 골프



미5공군 사령관 그렌 바커스 중장이 52년 7월 윤응렬(오른쪽) 당시 소위에게 십자훈장을 수여한 뒤 악수하는 모습.
윤응렬 장군은 1927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그는 16세이던 1943년 일본 규슈 비행학교에 들어간다. 일본 비행학교에 들어간 것은 무작정 비행기가 좋았기 때문이다. 일본 육군에 끌려가느니 차라리 공군에 들어가는 게 낫다는 판단도 한몫했다. 당시 일본 규슈 비행학교는 한국인 학생을 잘 받아주지 않았지만 전투기 조종사가 필요했던 일본은 평양 출신의 16세 소년에게 입학을 허용한다. 6개월간의 지상 교육과 고작 40시간의 기본훈련을 마친 윤응렬은 44년 인도네시아 자바의 일본 공군기지에 배속된다. 소년은 그곳에서 전투 비행훈련을 하면서 출격을 기다렸다. 그는 미국 군함을 향해 비행기를 몰고 돌진하는 가미카제 특공대의 일원이었다. 출격을 기다리던 그는 45년 이국 땅에서 해방을 맞는다.



<중앙SUNDAY 4월 25일자>



6·25 당시를 회상하는 윤응렬옹. 그는 “요즘 젊은이들은 전쟁이 남긴 교훈을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가 고향에 돌아온 것은 47년. 일본 군복을 벗은 그는 북한 인민군 중위로 변신한다. 그러나 공산정권의 이데올로기가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48년 38선을 넘어 월남한다. 그러고는 대한민국 육군항공대(공군의 전신)에 들어간다. 50년 6·25가 발발하자 그는 전투기를 몰고 북한과 맞서 싸웠다. 일본군→북한군→대한민국 공군으로 변신을 거듭한 것이다. 대한민국 공군으로 북한과 맞서 싸우면서 그는 생사의 경계를 수없이 넘나들었다. 그가 대한민국 공군으로 출격한 횟수만도 무려 107회. 그는 100회째 출격한 날짜(52년 5월 19일)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불시착한 횟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죽을 때가 가까워서 그런지 욕심이 생깁니다. 6·25 때 육군뿐만 아니라 공군도 맨주먹으로 싸웠다는 사실을 후손들에게 알리고 싶은 욕심 말입니다. 미국과 한국의 전쟁기념관에 6·25 당시 공군의 활약을 묘사한 전투 상황 재현 그림을 기증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6·25 때 사용됐던 F-51 무스탕 전투기.
올해 84세인 윤 장군의 유일한 취미는 골프다. 요즘도 틈날 때마다 부인과 함께 골프를 즐긴다. 드라이브샷 거리는 180야드 정도. 수년 전만 해도 200야드를 넘나들었지만 지난해부터 샷거리가 줄었다.



“샷거리가 줄어드니까 골프가 참 쉽지 않군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종종 80대 스코어를 기록하곤 했었는데….”



윤 장군은 여전히 거리를 늘리기 위해 애를 쓴다. 샤프트도 교체해보고, 스윙 자세를 연구하기도 한다.



“6·25가 일어난 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벌써 60년이나 됐나요. 시간이 그렇게 많이 흘렀으니 요즘 젊은이들이 6·25가 뭔지 모르는 것도 이해가 가요. 미셸 위도 할아버지와 내가 함께 싸웠던 전쟁이 어떤 것이었는지 모를 거예요. 부디 미셸 양이 6·25당시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긴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힘을 내기 바랍니다. 미셸 위 성적이 잘 나와야 할 텐데.”



정제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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