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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위해 바친 젊음 … 전우는 잊지 않았다

중앙일보 2010.06.25 00:17 종합 32면 지면보기
‘육군 소위 김의 묘’.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동제2묘역에 있는 묘비번호 1659의 비석에 적힌 표식이다. 성만 있고 이름은 없는 전사자 묘지다. 이 묘지 앞에는 1990년 현충일에 ‘육군 예비역 준장 황규만(사진)’의 이름으로 세운 추모석이 놓여있다. 거기에는 김 소위가 6·25전쟁 때인 1950년 8월27일 전사했다고 적혀있다. 도대체 무슨 사연일까.


[6·25 전쟁 60년] 황규만 예비역 준장의 헌신

◆6·25 전사자 유해를 14년 만에 찾아 국립묘지에 안장=해마다 6·25가 되면 황규만(79) 예비역 준장의 가슴은 뛴다. 잊을 수 없는 일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장 극적인 일은 1950년 8월27일에 있었다. 당시 수도사단 6연대 소속의 소위였던 그는 경북 안강지구의 도음산 384고지에서 북한군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그는 지원을 위해 고지에 올라온 1연대 소속 김 소위라는 사람을 만났다. 갑종 1기 출신이라는 김 소위는 적진을 관측하다 적의 사격에 전사했다. 그는 김 소위의 유해를 임시로 땅에 묻은 뒤 전투가 끝나면 안장하기로 했다. 하지만, 작전 때문에 부득이 현장을 급히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64년 5월7일, 도음산 384고지를 다시 찾은 그는 김 소위의 유해를 찾아내 5월29일 국립묘지에 안장했다. 하지만 고인의 이름을 알 길이 없어 묘비에 ‘육군 소위 김의 묘’라고 쓸 수밖에 없었다. 71년 준장으로 진급한 황 장군은 김 소위의 묘를 찾아 장군 계급장을 하나 놓고 왔다. 같은 육군 소위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적과 맞서던 중 전사한 고인에게 안타까운 마음을 나타낸 것이다.



동작동 국립묘지에 있는 김수영 소위(전사 뒤 중위로 추서)의 묘소. 90년 국립묘지를 찾은 유족들과 황 장군이 제사를 지내고 기념촬영을 했다. 왼쪽부터 김 소위의 큰누나 김수덕씨, 황 장군, 고인의 아들인 김종태씨, 그리고 작은누나 김수봉씨.
◆전사한 김 소위의 신원과 가족을 40년 만에 찾다=육군정보처장과 육군대학 교수부장을 지내고 75년 준장으로 예편한 황 장군은 82년부터 설날·현충일·추석에 김 소위의 묘소를 찾아 제사를 지냈다. 85년에는 김 소위가 전사한 도음산 384고지에 전적비를 세웠다. 그러다 90년 우연히 만난 갑종1기 출신 라보현 예비역 대령으로부터 입수한 동기 명부를 바탕으로 수소문을 한 끝에 그해 11월 김 소위의 신원을 파악하고 가족까지 찾게 됐다. 갑종 1기는 50년 1월31일 시흥 육군보병학교에 146명이 입교했는데, 6·25 전사자 30명 가운데 포항지구 전사자 네 명이 있었다. 이 가운데 김씨는 22년생인 ‘김수영’이란 사람밖에 없었다. 김 소위의 신원을 확인한 것으로 이를 바탕으로 고인의 아들 김종태(50년 6월22일생)씨와 딸 김광성씨, 그리고 누님 김수덕씨와 김수봉씨도 함께 찾을 수 있었다. 황 장군은 이들을 만나 김 소위의 장렬한 최후를 알리고 그때부터 한가족처럼 지내고 있다.



황 장군은 “당시 나라를 위해 희생한 분들의 유해를 찾아 가족 품에 안겨드리고, 후손들에게 그 분들의 이야기를 알리는 것은 그 시대를 살아온 모든 사람의 의무라고 생각한다”며 “이제는 정부에서 전몰자 유해 찾기를 본격적으로 하고 있어 다행”이라고 말했다.



경북 안강의 도음산 383 고지에 세운 김수영 소위 전적비. 그가 전사한 바로 그 자리에 세워졌다.
◆육사생도와 간부후보생 신분으로 전투에 참가=김 소위를 배출한 갑종1기는 6·25 직전인 50년 1월27일 465명이 경기도 시흥의 육군보병학교에 입교했다. 4월21일에는 2기생 150명이 뒤를 이었다. 전쟁이 일어나자 이들은 후보생 신분으로 문산과 김포반도 전투에 투입됐다가 67명이 전사했다. 갑종장교단중앙회에 따르면 갑종장교는 6·25전쟁에 1~49기 1만550명이 참전해 805명이 전사했다.



황 장군은 49년 7월15일 2년 과정의 육군사관학교 생도1기(나중에 육사 10기가 됨)로 태릉 육사에 입교했다. 하지만 재학중 6·25전쟁을 만나 개전 이튿날인 6월26일 포천지구에서 적과 교전을 치렀다. 육사생도들이 전투에 참가한 것은 45년 제2차 세계대전 말 독일 생도들이 베를린전투에 나선 것을 제외하곤 유례가 없는 일이다. 생도1기생 262명 중 포천전투에서 60여 명이 전사했으며, 6·25전쟁을 통틀어 113명이 희생됐다. 육사생도들은 포천에서 태릉-한강-용인 근처의 금량장-수원을 지나 후퇴했으며 그해 7월10일 대전 충남도청에서 서로 마주보며 계급장을 달아주는 것으로 소위 임관을 했다.



◆노(老)장군, 선진전술을 공부하다=황 장군은 전쟁 때문에 육사를 끝까지 다니지 못하고 바로 전투에 참가하는 바람에 군사 학습을 충분히 하지 못한 게 한이 됐다. 그래서 51년 국군으로는 처음으로 장교들을 도미 유학을 보낼 때 1기로 뽑혀 미 보병학교에서 공부했다. 64년에는 미국 육군참모대학으로 유학을 다녀와 군내에선 ‘공부하는 장교’로 통했다.



그는 지난 몇 년 동안 군사 관련 외국 서적의 번역에 몰두하고 있다. 『롬멜 보병전술』『 롬멜전사록』『 현대육군의 개혁』 등을 번역했다. 특히 올해 3월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육군참모총장이던 아서 브라이언트 경의 전쟁 회고록인 『워 다이어리』(플래닛미디어)를 번역, 출간했다. 864쪽 짜리 대작이다. 젊은 사람도 쉽지 않은 작업이다. 황 장군은 “6·25전쟁 당시 우리는 공부할 기회를 반납하고 대신 나라를 위해 싸웠다”며 “전 세계의 주요 전략·전술 서적을 찾아 번역하는 것은 당시 못한 공부를 한다는 의미와 함께 후배들에게 풍부한 자료를 제공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채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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