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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후 원산서 월남, 87세 고금순 할머니
고금순 할머니 가족이 남쪽으로 내려가기로 결심한 이유는 소련군 문제뿐만이 아니었다. 당시 할머니의 집은 부자였다. 땅도 많았고, 과수원과 공장도 운영했다. 그런데 해방 후 북쪽에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재산을 다 뺏는 거야. 이제는 나라에서 관리한다면서 말이야. 그래서 우리 부모가 이건 아니다 싶었나봐.”
45년 가을 그는 스님이었던 이모할머니와 함께 서울 청량리의 큰아버지 집으로 향한다. 세 살 어린 남동생은 두 달 전에 미리 남쪽으로 나왔고 부모님은 살림을 정리하기 위해 북에 남았다. 이후 서울에서 지내던 할머니는 6·25전쟁 2년 전 중매로 황해도 출신의 은행원과 결혼했다.
인천에서 살던 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에 군인 한 명이 급하게 집으로 찾아왔다. 그는 서울에 북한군이 내려왔다며 빨리 도망가라는 말을 전했다. 남편은 곧장 인천의 부둣가로 향했다. 할머니는 “나가보니까 경찰·공무원·은행원들이 배에 타고 있었어. 다들 남자였지. 공무를 보는 남자들은 북한군이 제일 먼저 죽인다고 해서 그 사람들을 먼저 피란시킨 거야”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남편이 탄 배는 충청도 앞 바다의 작은 섬으로 향했다고 했다.
인천에는 할머니와 아직 첫돌도 되지 않은 딸만 남았다. “그때 여자들은 다 그랬어. 남자들 먼저 피신시키고 우리가 다 알아서 했지.” 26일 할머니는 딸을 업고 피란길에 나서 가을이 지날 때까지 소래포구 근처에서 머물렀다.
하루는 인민군이 집에 들이닥쳐 “쌀은 어디서 구한 거야?”라며 총구를 할머니 가슴에 겨눴다. 할머니는 “내 동생이 인민군이라 가져다 줬소”라고 거짓말로 위기를 모면했다. 그러자 인민군들이 집을 떠났다. 할머니는 “정말 죽을 뻔했지. 얼마나 무섭던지…”라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우리 옆집에 살던 사람이 내가 쌀을 가진 걸 보고 인민군에 찔렀더라고. 그땐 그랬어. 옆집에 살아도 남북으로 나뉘어 서로 모함하고 괴롭혔지”라고 말했다.
1·4후퇴 때 평택으로 피했던 그는 전쟁이 끝나고 서울에 정착했다. 할머니의 부모도 거제도와 부산을 거쳐 서울로 왔지만 남동생은 전쟁 중 사망했다. “요즘 사람들은 잘 몰라.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눈앞에서 사람이 죽고 부모형제들하고 생이별하고….” 이어 그는 “전쟁 끝나고 ‘굳세어라 금순아’란 노래가 인기를 끄니까 사람들이 나한테 ‘금순아 굳세라~’라고 놀리는 거야. 근데 생각해 보면 정말 굳세게 살았어. 당시 사람들 모두가 굳세게 살았지”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