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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도 안 주고 물건도 안 팔고, 그땐 이북 피란민 차별 심했지

중앙선데이 2010.06.19 23:53 171호 6면 지면보기
“처음에는 무슨 일이 벌어진지도 모르고 학교 안 가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니깐 마냥 좋았지.”

초등학교 5학년 때 연백서 피란, 72세 송금순 할머니

송금순(72·사진) 할머니는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5학년 때 겪은 6·25를 그렇게 기억했다. TV에서 금순이를 찾는다는 자막을 보고 누가 자신을 찾나 하는 생각에 잠을 못 이뤘다는 할머니의 고향은 황해도 연백이다. 연백은 38선 바로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해방 이후 남한 정부의 관리를 받았지만 전쟁이 나자 곧장 피란을 떠나야만 했다.

15일 오후 4시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 재향군인회 상조회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요즘이야 초등학생도 똑똑하지만 그때 초등학생이면 정말 아무것도 모를 때 거든. 그냥 부모 따라 전국을 돌아다니는 게 재밌더라고.”

하지만 얼마 후 그도 전쟁을 실감하게 된다. 농사를 크게 짓고 방앗간까지 가진 부잣집이었던 탓에 아버지가 공산당원들에게 끌려가 20일간 심한 고문을 당한 것이다. 이후 송 할머니 가족은 황해도를 떠나 ‘똑딱배’를 타고 한강을 거쳐 영등포까지 내려왔고 다시 대전으로, 논산으로 향했다.

그는 “나는 부모가 재산을 가지고 나올 수 있어서 그래도 다행이었어. 덕분에 고생도 덜하고 잃어버린 가족도 없었지. 그렇지만 다른 피란민들은 정말 비참했어. 상상도 못 할 거야. 정말 거지처럼 살았거든”이라며 “전쟁이 끝나고 처음에는 이북에서 온 사람들한테 방도 안 내주고 물건도 잘 안 팔았어. 결혼도 안 시키려 하고. 차별이 굉장히 심했지. 그것 때문에 우리도 처음엔 고생 많이 했지. 그러다 논산에 군대 훈련소가 생기고 거기에 밀가루 납품하면서 조금씩 여유가 생겼어”라고 말했다.

논산에서 중학교까지 마친 할머니는 26세에 서울로 시집와 아들 하나와 딸 셋을 뒀다. 결혼 후엔 형편이 좋지 않아 청과물 도매상, 중국 보따리 장사, 심부름꾼, 잔치 음식이나 김치를 만들어 팔기도 했다. 지금은 재향군인 상조회에서 일을 하고 있다.
송 할머니는 “고향이란 게 얼마나 좋은 건 줄 알아? 수십 년 전이지만 선명히 다 기억나. 죽기 전에 딱 한 번 다시 보고 싶은데, 힘들겠지?”라며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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