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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찬 흥남부두, 생이별하던 사람들 눈물 못 잊어

중앙선데이 2010.06.19 23:52 171호 6면 지면보기
50년 넘게 남한에 살았지만 한금순(77·사진) 할머니는 여전히 북한 사투리를 쓰고 있었다. 16일 오후 2시 서울 강북구 번동 집에서 만난 할머니의 6·25 이야기는 노래 ‘굳세어라 금순아’의 내용을 보는 듯했다. 노래 가사처럼 그는 1·4 후퇴 때 중공군을 피해 흥남부두에서 배를 타고 거제도 피란민 수용소로, 그리고 다시 부산으로 갔다. 거제도에서는 북에 남아 있다 인민군이 돼 한국군의 포로가 된 오빠를 만났고 부산에서는 군복을 담당하는 군인이 돼 군부대에서 일하기도 했다.

‘굳세어라 금순아’ 노래와 닮은꼴 인생, 77세 한금순 할머니

한금순 할머니는 함경남도 함흥 출신이다. 그의 어머니는 과부였는데 130여 가구가 모여 살던 마을에서 2000평 넘는 큰 규모의 과수원을 운영했다. “이북 사람들 다 빨갱이라고 하지만 해방되고 나서 처음에는 다 태극기 흔들었지 인공기가 있었나요. 그런데 김일성 하고 공산당이 나오면서 세상이 이상해졌어요.”

당시 공산당에서는 사과나무부터 논에 심어진 벼까지 숫자를 파악해 갔다. 할머니 가족이 운영하던 과수원에서는 가장 좋은 상품을 골라 소련에 바쳤다. “김일성이가 잘해줬으면 왜 남으로 왔겠어요. 처음에 이론은 좋았죠. 다 같이 일하고 다 같이 먹자. 그런데 내가 일 한 걸 모두 당에 바치고, 자유도 없어지고. 누가 그런 정치 좋아하겠어요.” 할머니는 초등학교 시절 김일성과 스탈린 사진을 가슴에 안고 열을 맞춰 행진하는 ‘소년단’ 활동도 했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그땐 아무것도 몰랐죠.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 건데. 요즘 젊은 사람들한테 자유는 너무나 당연한 거니까 그게 소중한지 모르는 것 같아서 걱정돼요.”

그가 중학교 1학년 때 6·25전쟁이 시작됐다. 후방에 있었기 때문에 처음엔 전쟁이 벌어진 사실도 전혀 몰랐다. 며칠 후 라디오에서 ‘남한을 밀어버렸다’는 방송이 나온 것을 듣고 전쟁이 난 것을 알게 됐다. 얼마 후 전세가 역전돼 인민군이 북으로 후퇴해 오자 공산당에서는 집에 검은 천을 덮어 불빛이 새어 나가는 걸 막고 개가 짖는 소리를 없애기 위해 동네에 있는 모든 개를 죽였다.

“마을에 인민군이 들어오면 ‘속이 흰 사람들(공산당이 아닌 사람)’ 모아다 다 죽이고, 남쪽 군대가 들어오면 이번에는 빨갱이들 찾아서 다 죽이고. 몇 달 사이에 그렇게 왔다 갔다 하면서 서로 죽이고. 아휴… 전쟁이란 게 그런 거예요.”

그는 18세가 되던 1951년 1·4후퇴 때 피란을 떠났다. “겨울이 됐는데 중공군이 도끼랑 낫을 가지고 내려와서 한국 사람은 다 죽인다는 소문이 도는 거예요. 그게 무서워서 피란을 떠났죠.”

피란을 떠나기까지 그의 어머니는 중대한 결심을 해야 했다. 한금순 할머니에겐 오빠 한 명과 두 명의 남동생이 있었다. 그런데 오빠가 전쟁 직전 집을 나가 소식을 알 수 없었다(그의 오빠는 인민군으로 참전했다 포로가 돼 거제도 수용소에서 가족과 다시 만나게 된다). 오빠의 소식을 알 길이 없었던 당시에는 집에 남아 오빠를 기다리느냐, 아니면 나머지 자식 3명을 살리느냐를 선택해야 했다. 할머니의 어머니는 결국 자식을 하나라도 더 살리자는 생각에 피란을 결정했다.

흥남부두까지 가는 길은 험했다.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후퇴하는 국군과 유엔군이 피란민과 한데 섞였다. “무섭고 너무 추웠어요. 함경도의 겨울은 여기랑은 비교도 안 돼요.” 어머니와 남동생 둘과 함께 흥남부두에 도착하니 벌써 수많은 피란민이 군데군데 모여 모닥불을 쬐며 웅성대고 있었다. 마침내 ‘LST 수송선’의 문이 열리고 승선이 시작됐다. 할머니는 “처음에는 질서가 지켜지는 것 같았는데 갑자기 뒤에서 사람들이 밀려들어 왔어요. 그러면서 한데 엉켜 이리저리 쏠려 다녔죠. 물에 빠진 사람도 있었고요. 그때 가족들하고 생이별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데요. 어휴. 그때 그 사람들 눈물은 아직도 안 잊혀져요”라며 “‘굳세어라 금순아’ 노래가 그냥 나온 게 아니에요”라고 말했다.

흥남부두를 떠난 수송선이 도착한 곳은 거제도였다. 거제도 한편에 마련된 피란민 수용소에 네 가족이 모여 살았다. 수용소는 열악했다. 나무기둥에 볏짚으로 벽과 천장을 만들었다. 바로 옆은 소가 사는 외양간이었다. 배급받은 쌀로 죽을 쑤어 물을 부어 4인분으로 불려 먹었다. 그러던 어느 날 건넛마을 북한군 포로수용소에 소식이 끊겼던 오빠가 있다는 얘기를 듣게 됐다. 수소문 끝에 오빠에게 안부를 전할 수 있었다. “오빠를 거기서 만났으니 다행이죠. 안 그랬으면 우리가 계속 북에 있는 줄 알고 오빠가 전쟁 끝나고 부산에서 포로들한테 남한과 북한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을 때 북한을 선택했을 거예요.” 할머니의 오빠는 이후 한국군으로 근무하다 제대했다.

거제도에서 2년을 보낸 한금순 할머니는 홀로 부산으로 나왔다. 나머지 가족들은 친척이 있는 서울로 올라갔다. 먹고 살기 힘들어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그는 부산에서 군복을 관리하는 군인이 됐다. 군번도 받고 부대 막사에서 생활했다. 쌀, 건빵, 담배 같은 군인 보급품은 가족들에게 부쳤다.

24세가 된 해 가을 어느 날 서울에서 어머니가 위급하다는 전보가 왔다. 급하게 서울로 가보니 사실은 약혼식 자리였다. 한금순 할머니는 “올라가 보니 열세 살이나 많은 남자하고 약혼을 하라는 거예요. 전쟁이 막 끝난 후라 언제 다시 전쟁이 날지 모르니 젊은 남자랑 결혼했다가 자기처럼 과부 된다며 어머니가 나이 많은 남자를 찾은 거예요”라며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 처음엔 싫었죠. 그래도 어떻게 해요. 어머니랑 삼촌들이 무조건 결혼하라는데요”라고 말했다.

결국 얼마 후 할머니는 양복점을 운영하던 남편과 결혼해 서울 신당동에 자리를 잡았다. “남편도 북에서 왔는데 부잣집 도련님이라 그런지 생활력이 전혀 없었어요. 그래서 내가 생계를 책임졌죠. 아들, 딸 한 명씩 있는데 교육도 시켜야 하고… 안 해 본 장사가 없어요.” 그때부터 그는 신당동에서 뻥튀기·담요·건어물·연탄·사탕 장사 등을 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왔다. 장사 수완이 좋아 주변 사람들은 할머니를 ‘신당동 또순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금순이란 이름이 마음에 드느냐는 질문에 그는 “옛날 이름이 다 그렇죠. 누가 나 같은 사람 이름 불러주기나 하나요. 그나마 금순이란 이름 덕분에 많이 불려진 것 같아요. 지금까지 힘들게 살았어요. 그래도 노래 가사처럼 굳게 마음먹고 살았어요. 전쟁과 공산당이 얼마나 무서운 건데…. 이만큼 살게 해준 대한민국에 감사해요”라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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