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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뉴욕의 대표 문화로 그려내

중앙선데이 2010.06.19 23:19 171호 22면 지면보기
‘섹스 앤 더 시티’의 네 주인공. 대도시 뉴욕에 사는 전문직 싱글 여성인 이들에게 브런치는 우정과 일상을 나누는 요긴한 자리다. [중앙포토]
반세기 전, 신분 상승을 꿈꾸던 뉴욕의 아가씨 홀리(오드리 헵번)는 보석상점 ‘티파니’의 쇼윈도 앞에서 베이글과 커피로 아침을 즐겼다. 고전이 된 지 오래인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 나오는 장면이다. 요즘 영화라면 아침보다는 브런치가 어울릴 것 같다. 도시인들이 제법 멋스럽게 브런치를 즐기는 모습은 그만큼 할리우드 영화나 드라마에도 흔하게 등장한다.

영화 장면 속의 브런치

최근 국내의 서구식 브런치 문화가 미디어를 통해 학습된 것이라면 ‘섹스 앤 더 시티’는 그중에도 가히 교과서 같은 작품이다. 이 걸출한 TV 시리즈는 뉴욕 맨해튼을 가로지르는 네 여자의 싱글 라이프를 1998년부터 6년 동안 드라마에 담아낸 것으로도 모자라 벌써 2편의 영화까지 생산해 냈다. 에피소드마다 네 주인공이 소호,첼시, 미트패킹 디스트릭트, 어퍼이스트사이드 등 맨해튼 곳곳의 다양한 레스토랑에서 브런치를 즐기는 장면은 이 TV 시리즈의 주무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토끼도 울고 갈 만한 푸성귀로 가득한 샐러드부터 버터와 시럽이 잔뜩 올려진 팬케이크까지, 메뉴도 칼로리도 다양한 그녀들의 브런치 테이블에는 물론 남자라는 메뉴 역시 사시사철 시시각각 다채롭게 바뀌며 등장한다.

그렇다고 브런치 테이블이 늘 화목한 건 아니다. 영화 ‘줄리&줄리아’에서 2000년대 초의 여성 줄리(에이미 애덤스)는 1940년대 말의 전설적인 아줌마 셰프 줄리아(메릴 스트립)의 조리법을 1년간 재현하는 프로젝트에 도전한다. 이런 도전의 촉매가 된 것은 친구들과의 브런치에서 맛본 굴욕이다. 사실 줄리는 그저 요리를 좋아할 뿐, 뭔가를 이루겠다는 의지도, 이를 위해 안정된 직장을 버릴 용기도 없었다.

어느 날 친구들과의 브런치 장소에 도착한 줄리는 비서까지 거느리고 승진과 성공의 사다리를 타는 친구들 사이에서 뭔가 문제 있는 30대 여자로 치부당하고, 이런 경험 덕에 새로운 일에 도전할 결심을 하게 된다. 고통의 브런치는 30대에게만 찾아오는 게 아니다. 맨해튼 상류층 10대들의 드라마 ‘가십걸’에서 브런치 레스토랑은 ‘절친’인 세레나 와 블레어가 서로 고민을 털어놓는 살가운 비밀동굴이기도 하지만, 출신·외모에 의해 무자비하게 등급이 나누어지는 살벌한 장소로 둔갑하기도 한다.

“Yes, Yes, Yes… YYYY---eees!!!!!” 대낮 식당에서 교성을 지르기 시작한 여자는 점점 흥분이 고조된 듯 급기야 탄성까지 내지른다. 로맨틱 코미디의 고전이 된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한 장면이다. 줄거리가 가물가물해져 버린 관객이라고 해도, 이 기막힌 장면을 잊기는 힘들 것이다. 이 장면에 등장한 것만으로도 여전히 관광객들에게 인기인 ‘카츠 델리카트슨’을 비롯해 뉴욕 맨해튼에는 영화로도 유명해진 브런치 식당이 여럿이다.

조지 거슈인의 음악과 함께 펼쳐지는 우디 앨런의 영화 ‘맨해튼’의 초반에 등장하는 ‘엠파이어 다이너’, 영화 ‘언페이스풀’에서 유부녀 코니(다이앤 레인)가 친구들과 브런치를 즐기던 도중 화장실에서 매력남 폴(올리비에 마르티네즈)과 격렬한 정사를 나누는 ‘카페 누아르’, 영화 ‘그 여자 작사 그 남자 작곡’에서 소피(드루 배리모어)와 알렉스(휴 그랜트)가 밤새 함께 곡을 쓰고 늦은 아침을 먹기 위해 들르는 ‘시티 베이커리’ 등. 이런 여러 할리우드 영화들은 브런치를 곧잘 미국, 그중에도 뉴욕의 문화로 그려왔다. 하지만 영화 ‘러브&트러블’은 영국판 보그지의 에디터 잭스(브리트니 머피)를 내세워 런던식 브런치의 즐거움을 전한다. 영국에도 ‘잉글리시 브랙퍼스트’나 ‘애프터눈 티’만 있는 게 아니라는 듯 말이다.

브런치가 꼭 화려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영화 ‘사랑의 레시피’의 케이트(캐서린 제타 존스)는 잘나가는 프렌치 레스토랑의 셰프지만 정작 엄마를 잃고 자신과 함께 살게 된 어린 조카 조이(애비게일 브레슬린)의 마음을 열게 만드는 어떤 요리도 만들어 내지 못한다. 그러던 조카가 부주방장 닉(아론 에크하트)이 만든 간단한 파스타를 허겁지겁 먹던 모습을 보며 케이트는 조카에게 필요한 것이 7성급 호텔의 풀코스 요리가 아니라 엄마의 마음이 담긴 소박한 가정식이었음을 깨닫는다. 어느 날 아침, 제법 가족 같은 풍경 속에 세 사람이 함께 팬케이크를 구워 간단하게 브런치를 준비하는 장면은 멋진 브런치가 꼭 마놀로 블라닉 구두와 샤넬 가방을 곁들여야만 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미국 TV 시리즈 ‘섹스 앤 더 시티’의 마지막 시즌에서 예술가 애인을 따라 뉴욕을 등지고 파리로 떠난 캐리는 지독한 외로움에 시달린다. 브런치를 즐기는 한 무리의 프랑스 여자들을 보며 캐리는 아무리 달콤한 도시라도 이를 함께 나눌 친구들이 없다면, 그리고 이를 즐길 스스로를 잃어버렸다면 쓰디 쓴 곳이라는 걸 깨닫는다. 사실 할리우드 영화나 드라마 속의 여자들처럼 브런치를 즐기기 위해 뉴욕행 비행기표를 마련할 필요는 없다. 근사한 파스타나 에그 베네딕트가 아니라 김치 넣은 라면에 찬밥이라도, 늦은 아침을 여유 있게 즐길 수 있고, 마주 앉아 수다와 음식을 함께 나눌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야말로 전 우주에서 가장 힙(hip)한 브런치 레스토랑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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