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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지리아전 위해 뽑았다” … 이동국 승부수

중앙선데이 2010.06.19 23:11 171호 3면 지면보기
한국 축구대표팀은 숙명인 듯 수많은 ‘경우의 수’ 앞에 서 있다. 한국의 16강 진출 가능성은 50% 이상이다.

16강전 갈림길 23일 나이지리아전

아르헨티나가 그리스에 이기면 한국은 나이지리아와 비기기만 해도 아르헨티나에 이어 조 2위로 16강에 오른다. 그러나 한국이 나이지리아와 비겨도 그리스가 아르헨티나를 이기거나 두 팀이 비기면 한국이 탈락할 수 있다. <표 참조> 나이지리아에 지면 무조건 귀국이다. 아르헨티나와 그리스의 경기 결과는 한국의 힘으로 어쩔 수 없다. 결국 나이지리아 골의 그물을 흔들어야 한다.

한국의 경기는 23일 오전 3시30분 남아공 더반에서 벌어진다.
나이지리아를 상대하는 마음은 아르헨티나와 경기할 때와 다를 것이다. “아르헨에 대한 두려움이 만들어낸 최악의 참사”라는 축구 평론가 존 듀어든의 말은 정곡을 찔렀다. 박주영의 자책골도 두려움에 몸이 굳은 나머지 기록하게 된 비극이 아닐까. 그러나 나이지리아와의 경기는 다르다. 한국은 나이지리아에 진 적이 한 번도 없다. 2승1무.

이동국(왼쪽)이 훈련하는 모습을 허정무 감독이 뒤에서 지켜보고 있다. 허 감독은 “나이지리아전을 위해 이동국을 뽑았다”고 말했다. [루스텐버그=연합뉴스]
더구나 한국이 상대할 나이지리아는 팀 사정이 좋지 않다. 오른쪽 날개 사니 카이타는 그리스와의 경기에서 퇴장당해 23일 출전할 수 없다. 왼쪽 수비수 타예 타이워, 왼발의 명수 우와 에치에질레는 부상으로 정상 컨디션이 아니다. 한국은 정예 멤버를 가동해 승부수를 던질 수 있다. 16강으로 가는 길목을 터야 할 첨병은 이동국과 박주영이다.

허정무, 아르헨전서 9분간 이동국 시운전
남아공으로 가는 비행기에 오르기 전 ‘유쾌한 도전’을 외친 허정무 감독은 아르헨티나에 진 뒤 심각해졌다. 유쾌함은 사라지고 비장감만 남았다. 어려움에 빠진 한국의 스포츠 지도자들은 흔히 사자성어를 애용한다. 허 감독은 “파부침주(破釜沈舟·솥을 깨고 배를 가라앉힌다)의 심정으로 마지막 경기에 나서겠다”고 출사표를 던졌다. 퇴로가 없는, 사생결단의 싸움을 해보겠다는 뜻이다.

이동국이야말로 허 감독의 비장한 심정에 공감하는 선수이리라. 그에게는 월드컵에 맺힌 한이 있다. 박지성과 이영표가 2002년 6월 광주에서 스페인을 꺾은 다음 줄줄이 손을 잡고 슬라이딩 세리머니를 할 때 대표선수가 되지 못한 이동국은 여행 중이었다. 월드컵 열기가 닿지 않는 곳만 찾아 다녔다. 2006년에는 월드컵 개막을 두 달가량 앞두고 무릎십자인대가 끊어져 대표팀에서 빠졌다. 그는 월드컵이 열리는 독일에서 재활 훈련을 했다.

이동국은 지난해 K-리그에서 득점왕을 차지했다. 하지만 허정무 감독은 이동국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주워먹는 골만 넣는다”는 말도 했다. 하지만 이동국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감독님이 원하는 바를 충족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몸을 낮췄다. 고진감래라고 했던가. 이동국은 최종 엔트리 23명을 뽑는 마지막 순간까지 가슴을 졸인 끝에 남아공행 티켓을 손에 넣었다.

12일 열린 그리스와 1차전. 허 감독은 2-0으로 앞선 후반 42분 박주영을 벤치로 불렀다. 그런데 운동장 구석에서 열심히 몸을 풀던 이동국이 아니라 이승렬을 출전시켰다. 이동국은 벤치로 돌아갔다. 그러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짧은 시간에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준비하겠다”며 다음 기회를 노렸다.

17일 아르헨티나와 경기에서는 후반 36분 박주영 대신 이동국이 들어갔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이후 12년 만의 월드컵 무대 복귀였다. 전문가들은 이 교체를 나이지리아와의 경기에 대비한 것으로 봤다. 허 감독이 23명 엔트리를 뽑은 다음 “이동국은 나이지리아와의 3차전만 보고 뽑은 선수”라고 말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동국의 장점은 득점력이다. 그러므로 그의 기용은 골을 넣어 달라는 뜻을 담고 있다.

아르헨티나에 1-4로 패한 이튿날인 18일. 루스텐버그 훈련장의 대표팀 분위기는 생각보다 어둡지 않았다. 훈련 도중 웃음도 터졌다. 침체된 분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 담긴 웃음이었다. 하지만 이동국의 눈동자에는 정말 생기가 넘쳤다. 축구 인생을 건 한판 승부가 다가오고 있다는 걸 즐기는 듯했다. 이동국은 “뛰는 데는 문제없다. 문제는 잘 뛰는 것 아니겠는가”라며 출전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

지금 박주영에게 필요한 건 대담성
박주영이 부진해도, 심지어 자책골까지 넣었어도 한국의 주전 공격수이며 스타팅 멤버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는 놀랄 만한 재능을 타고난 선수지만 큰 대회에서 운이 따르지 않았다. 이른바 ‘박주영의 빅매치 징크스’다. 이 징크스를 깨야 더 큰 선수가 된다.

박주영은 2005년 네덜란드 세계 청소년 월드컵 때 한 골을 기록했지만 조별 리그에서 탈락했다.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는 주전 경쟁에서 밀려 토고와의 1차전, 프랑스와의 2차전에 출전하지 못했다. 스위스와의 최종전에는 선발로 나섰지만 큰 실수를 했다. 미드필드에서 불필요한 파울을 해서 프리킥을 내줬고, 결국 이 프리킥은 스위스의 결승골로 연결됐다. 박주영은 후반에 교체돼 나왔다.

박주영에게 필요한 것은 운이 아니라 대담성이 아닐까. 박주영은 훈련할 때 가장 좋은 슈팅 감각을 보이고 있다. 프리킥 훈련을 할 때는 지켜보는 사람들이 박수를 칠 만큼 기가 막힌 솜씨를 보여준다. 이 실력이 실제 경기에서 나오지 않는 게 문제다.
아르헨티나와의 경기가 끝난 다음 차가운 표정으로 라커룸을 빠져나가는 박주영을 인터뷰한 기자는 없다. 골을 넣은 다음에도 말이 많지 않은 내성적인 선수여서 인터뷰를 기대한 기자도 드물었다. 박주영은 이튿날에야 기자들의 빗발치는 질문에 대답했다. 그는 “아르헨티나전에서 한 실수는 인정한다. 나이지리아와의 경기에서는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수밖에 없다 ”고 말했다.

동료들은 모두 박주영의 편이었다. 이영표는 “주영이 혼자만의 잘못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실점한 것이다”고 말했다. 허정무 감독도 “운이 따르지 않았다”며 박주영을 감쌌다. 어린 시절부터 박주영은 비난을 들어본 일이 없다. 워낙 골을 많이 넣는 선수이기에 똑같은 실수를 해도 박주영은 용서를 받았다. 박주영은 이런 배려를 골로 보답해왔다. 이런 면에서 나이지리아와의 경기는 그에게 기회다.

조직력으로 모래알 나이지리아 뚫어라
나이지리아는 2패를 당하고도 16강을 꿈꾼다. 나이지리아의 꿈이 살아 있다는 말은 한국이 그만큼 힘든 경기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나이지리아도 사력을 다할 것이다.
나이지리아는 월드컵 본선 진출을 이끈 자국 감독 아모두를 해임하고 스웨덴 출신 라르스 라예르베크 감독을 영입했다. 그게 2월의 일이고, 라예르베크 감독이 선수들과 제대로 훈련을 시작한 건 불과 한 달 전이다. 훈련 시간이 불과 한 달 남짓이라는 사실은 나이지리아의 한계와 저력을 동시에 보여준다.

불과 한 달 만의 훈련으로도 나이지리아는 아르헨티나와 박빙의 대결을 할 수 있는 전력을 구축했다. 하지만 그리스에 1-2로 패하는 장면에서 보듯 허점도 많은 팀이다. 공격과 수비 모두 조직력보다는 선수들의 개인 기량에 크게 의존한다.

한국은 나이리지아보다 조직력, 승리를 향한 강한 열망, 서로을 위해 희생하겠다는 팀 정신에서 앞선다. 허정무 감독은 “ 나이지리아에는 훌륭한 공격수가 많다. 상대가 처음부터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강한 프레싱으로 막겠다. 또 수비에서는 블록을 이루고 있지 않다. 그 허점을 이용하겠다”고 전략을 밝혔다.

경기장 분위기는 나이지리아에 유리할 것 같다. 더반은 나이지리아 이민자들의 집단 거주지다. 7만 명을 수용하는 더반 스타디움이 나이지리아 홈구장처럼 변할 수도 있다. 더반 나이지리아 교민회장 데니스 오사주와는 ‘나이지리아 트리뷴’과의 인터뷰에서 “더반 경기장을 (나이지리아 대표팀의 색깔인) 녹색과 흰색으로 뒤덮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부부젤라의 소음도 아프리카 선수들의 귀에는 익숙하다.

하지만 더반은 한국 스포츠와도 인연이 있다. 1974년 권투선수 홍수환이 원정을 와서 홈링의 아널드 테일러를 흠씬 두들긴 끝에 15회 판정으로 이기고 세계권투협회(WBA) 밴텀급 챔피언이 됐다. 당시 홍수환은 어머니와 통화하면서 “엄마, 나 참피온(챔피언) 먹었어!”라고 소리쳤다. 23일 한국의 대표선수들은 “16강 먹었어!”를 외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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