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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여유, 시간의 여유 … 주말 낮시간의 ‘만찬’

중앙선데이 2010.06.19 23:06 171호 20면 지면보기
브런치(brunch)는 점심을 겸하는 늦은 아침식사를 뜻한다. 아침(breakfast)과 점심(lunch)의 합성어다. 우리말로 옮기자면 이래저래 아점(아침+점심)이 제격이다. 그런데도 ‘아점’이 아니라 ‘브런치’라고들 하는 걸 보면, 지금 우리 사회에서 브런치가 그저 늦게 먹는 아침밥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서울 신사동 가로수길·홍대 앞 등에서 성업 중인 브런치 식당들의 메뉴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최근 한식·일식 같은 퓨전도 등장하고 있지만 브런치로 불리는 메뉴의 주종은 아직까지 서양식 아침식사, 즉 계란·베이컨·감자·프렌치 토스트·와플 등의 조합에 음료를 곁들이는 게 대부분이다.

외국 여행 중이라면 모를까, 주말 아침부터 이런 음식을 기꺼이 찾아가 먹는 이들이 늘어났다는 건 우선 그만큼 입맛이 달라졌다는 의미다. 나아가 서양의 음식만 아니라 브런치 같은 식사 풍습에도 친근감을 느끼는 이들이 늘었다는 얘기도 된다. 여기에는 유학·해외 근무 등 직접적 경험 외에 ‘섹스 앤 더 시티’ 같은 미국 드라마도 제법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미국에서 1998년 첫 전파를 탄 뒤 2004년 종영한 이 드라마는 요즘도 국내 케이블TV에서 꾸준히 재방송 중이다.

대도시 뉴욕에 사는 전문직 싱글 여성인 네 주인공은 성(性)에 대한 솔직한 생각과 행동은 물론이고 브런치의 미덕 역시 유감없이 보여줬다. 물론 한밤의 파티 같은 것도 이 드라마에 나오는 도시의 싱글에게는 중요한 일상이지만, 이런 파티에는 이성을 향해 촉수를 곤두세우는 긴장이 있게 마련이다. 네 여자의 주말 브런치는 이런 긴장감은 물론, 각자의 일에서 오는 긴장으로부터도 자유롭고 편안한 자리다. 그렇다고 차림새를 보면 긴장을 아주 풀어버리는 것도 아니다. 안 그래도 이 드라마는 주인공들의 패션으로도 유명하다. 브런치라고 트레이닝복에 고무줄로 머리를 질끈 묶는 식의 허술한 차림으로 등장할 리는 없다.

대중문화 웹진 ‘10 아시아’의 백은하 편집장은 “미국 드라마나 영화에서 브런치는 ‘게으른 자들의 늦은 아침’이 아니라 스스로를 위해 한낮에 자율적으로 즐기는 만찬의 다른 이름”이라고 지적한다.

드라마의 주인공이 아닌 여느 서양인에게 브런치는 어떤 의미일까. 한국에 4년째 살고 있는 한 캐나다 여성은 “우리 가족은 일요일마다 브런치를 즐기는 게 전통”이라고 들려준다. 평일 아침은 동서양, 애·어른을 막론하고 등교나 출근으로 바쁘게 마련이다. 그래서 시리얼 등으로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일요일에는 서양식 아침식사의 각종 음식을 비교적 푸짐하게 만들어 함께 먹는다는 얘기다. 달리 옮기면 평일에는 미숫가루 한 대접을 후딱 마시고 출근하다 일요일에는 가정식 백반을 차려먹는 격이다. 평일 아침식사에 비하면 시간도, 음식도 여유롭다는 것이 주말 브런치의 특징이다.

국내에 브런치 문화가 확산된 데도 자연히 시간적 여유, 특히 2000년대 중반부터 주5일제가 도입되면서 주말이 길어진 것이 중요한 요인으로 꼽힌다. 밖에서 먹는 브런치는 지갑의 여유도 필요하다. 식당가의 브런치 메뉴는 대개 1인당 1만원대 이상이다. 직접 음식을 만드는 수고를 덜어준다고 해도, 주말 한낮 가정 배달음식의 대명사격인 자장면 등과 비할 바 아니다. 이를 기꺼이 지불하고도 밖에서 브런치를 즐기는 데는 음식 외의 이유가 있을 법하다. 인간사회에서 식사는 영양분을 섭취하는 활동이자 함께 식사하는 사람들 사이의 사교활동이다. 드라마 속 네 여자가 그랬듯, 중앙SUNDAY가 브런치 자리에서 만난 이들은 친구든 가족이든 서로 모이는 의미를 강조했다.

국내와 좀 다른 이유지만 미국에서도 브런치가 새로 인기를 끌고 있다. 지난해 가을 타임지는 시장조사기관 NPD를 인용해 연초부터 8개월간 미국의 브런치 시장 규모가 전년도 같은 기간에 비해 8% 늘었다고 보도했다. 지난해라면 2008년 전 세계를 뒤흔든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다. 미국인들이 지갑을 닫고 외식 대신 직접 요리를 해먹는 경우가 크게 늘어난 시기다. 자연히 저녁 외식 수요는 줄어든 반면 상대적으로 가격이 싼 브런치로 주말 외식을 하는 경우가 늘었다는 것이다. 이 보도에 따르면 미국에는 브런치 메뉴에다 블러디 메리 같은 칵테일을 공짜로 제공하는 식당도 많다. 반주를 곁들이는 저녁 외식의 분위기를 한낮의 브런치로도 대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음한 뒤 서양음식을 먹으라면 고문으로 여기는 이들도 많지만, 서양식 브런치라고 해장 기능이 없으란 법은 없다. 믿거나 말거나 에그 베네딕트도 한 예다. 국내 브런치 식당에도 곧잘 등장하는 에그 베네딕트는 잉글리시 머핀 위에 치즈·베이컨 등과 수란(水卵)으로 익힌 달걀, 그리고 달걀 노른자로 만든 홀란데이즈 소스를 곁들인 음식이다. 그 유래에 대해 설이 분분한데 그중 하나가 바로 베네딕트라는 성을 쓰는 월스트리트의 증권거래인이 간밤의 숙취를 달래기 위해 먹은 데서 시작됐다는 주장이다. 브런치라는 말 역시 유래가 분분한데 잡지 같은 데 활자로 처음 등장한 것은 19세기 말 이후로 전해진다. 따지고 들면 브런치 문화는 국내만이 아니라 인류의 긴 역사에서도 비교적 최신 현상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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