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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 상승, 출생 비밀…다음 스토리 안 봐도 비디오

중앙선데이 2010.06.19 16:15 171호 4면 지면보기
일본 드라마는 한국 드라마와는 달리 담백하다고, 불륜과 출생의 비밀, 복잡한 삼각관계 같은 건 좀처럼 볼 수 없다고 누가 누가 말했던가. 요즘 일본 드라마를 보면, ‘어? 저건 어디선가 본 적 있는데?’ 싶은 장면들이 자주 등장한다. 한국 드라마 팬들에겐 너무나 익숙한 캐릭터, 익숙한 설정. 능히 다음 회 전개까지 점칠 수 있을 정도다.

이영희의 코소코소 일본문화: 한국 드라마 따라하기

황금 시간대인 월요일 밤 9시에 후지TV에서 방송 중인 드라마 ‘달의 연인(月の戀人)’을 보자. 일본 최고 배우 기무라 다쿠야와 대만 출신의 여배우 린즈링이 출연해 화제를 모은 이 작품은 회를 거듭할수록 ‘한국 드라마 필’을 마구 내뿜는다. 아픈 어머니와 함께 사는 가난한(그러나 아름다운) 중국 여성이 일본 인테리어 회사 사장의 눈에 들어 신분상승을 이루게 된다는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 사업밖에 모르고 인정이라고는 없는 남자 주인공 캐릭터는 ‘천국의 계단’이나 ‘아름다운 날들’에서 보던 그 주인공들과 판박이다.

15%가 넘는 시청률을 올린 TV아사히의 ‘동창회(同窓會)-러브 어게인 증후군’은 어떤가. 설문조사에서 ‘이상적인 엄마상’으로 자주 뽑히는 여배우 구로키 히토미(사진)가 주연을 맡은 이 드라마는 중학교 동창회에서 재회한 45세 중년 남녀의 이야기를 다룬다. 남편의 실직으로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주인공이 학창 시절 첫사랑을 다시 만나 브레이크 없는 사랑에 빠져든다는 이야기. 남자 주인공을 형사로 설정해 약간의 미스터리를 가미하긴 했지만, 전개 과정은 한국 불륜 드라마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한국 드라마가 주로 방송되는 낮 시간대를 겨냥해 후지TV가 새롭게 편성한 드라마는 제목이 아예 ‘요부와 숙녀(妖婦と淑女)’다. 가난한 여성이 부잣집에 들어가 의문의 사고로 숨진 그 집 딸의 인생을 대신 살게 된다는 이야기다. 출생의 비밀과 삼각관계, 음모가 주요 소재다. 주인공을 둘러싼 비밀이 하나하나 밝혀지는 전개방식, 과장되고 극적인 대사는 ‘욕하면서 봤던’ 한국 드라마 ‘아내의 유혹’을 떠올리게 한다.

이건 아무리 봐도 한류의 영향이다. 전통적 인기소재인 추리물과 의학 드라마를 제외하면, 그간 일본 드라마를 대표해 온 ‘섬세하지만 뜨뜻미지근한 연애물’이나 ‘왁자지껄한 학원물’ 등은 차츰 자취를 감추고 있다. 그 자리를 ‘한국풍 드라마’들이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 시청자들조차 “작가분이 한국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것 같네요”라는 의견을 인터넷에 남길 정도니.

주간지 ‘아에라(AERA)’는 지난달 특집기사에서 “한국 드라마는 일본인의 마음에 결핍된 무언가를 채워준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주변을 둘러보면 교통사고로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도, 산부인과에서 부모가 바뀐 사람도 없지만, 그런 인생 수십 명을 응축시켜놓은 듯한 캐릭터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어느새 뜨겁고 격렬한 세계가 된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욕만 얻어먹는 설정들이 일본에서는 장점으로 돌변한 셈이다.

일본 월드컵 대표팀이 카메룬전 승리를 거둔 지난 14일 밤 시부야 교차로에서는 기뻐 난동(?)을 부리는 젊은이들과 경찰이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신호등에 올라가 방방 뛰는 청년들을 TV로 보며 “꽤 하는데?” 싶었다. 일본 팀이 골을 넣어도 ‘옆집에 폐가 될까 봐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던 일본인들 아니었던가. 한국과 일본, 이 두 나라는 아무래도 점점 닮아가고 있는 것 같다. 예전에는 바람의 방향이 일본에서 한국이었다면, 이번엔 그 반대다.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일하다 현재 도쿄 게이오 대학에서 국제관계를 공부하고 있다. 아이돌과 대중문화에 대한 애정을 학업으로 승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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