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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카펫뿐인 소박한 무대를 달군 이야기의 힘

중앙선데이 2010.06.19 16:13 171호 5면 지면보기
영국 출신의 피터 브룩(85)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연극 연출가로 꼽힌다. 아흔을 앞둔 나이에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하는 그를 두고 ‘현대 연극의 살아있는 전설’이라고 칭송한다. 한국에서도 이런 평가에 이의를 달 연극 종사자는 거의 없다. 한데 정작 그의 작품을 눈으로 확인한 사람은 많지 않다. 해외에 나가지 않고서는 작품을 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전설’로 지목되는 것은 매우 혁신적인 그의 작품이 간혹 본 사람들의 전언을 통해 신화화한 언사로 국내에 흘러들어오거나 연극의 바이블 같은, 유려한 필체로 쓰인 『빈 공간』 등 그의 연극 이론서들이 갖는 무게감 덕이다.

정재왈의 극장 가는 길 - 피터 브룩의 연극 ‘11 그리고 12’

17일 아르헨티나와의 월드컵 경기가 있던 날 밤, 피터 브룩의 최신작 ‘11 그리고 12’가 한국에서 초연됐다. 이를 두고 공연장인 LG아트센터 프로그램은 ‘역사적’이라는 수식어를 달았는데, 과장스럽지는 않았다. 오히려 60년이 넘는 연출 이력에 비해 그의 작품이 너무 늦게 한국에 소개됐다는 아쉬움이 앞섰다.

수백만 인파가 거리 응원으로 나서던 순간 썰렁할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극장은 관객들로 붐볐다. 이 정도면 거장에 대한 예우는 갖춘 셈이었는데, 작품과 함께 직접 그의 모습을 보진 못했다. 장거리 비행이 힘들 정도로 워낙 연로해서 한국 방문은 이뤄지지 않았다고 한다.

피터 브룩이 지난해 11월 자신의 연극 본거지인 프랑스 파리 ‘뷔페 드 노르 극장’에서 세계 초연한 ‘11 그리고 12’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혁신적인 스타일리스트로서의 면모보다 사색적인 연극 철학자의 모습이 두드러졌다. 뜻이 다른 ‘타자(other)’에 대한 관용을 역설하는 주제 의식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 대입해도 무리가 없었다.
스타일면에서 ‘11 그리고 12’는 피터 브룩 연극이론의 핵심인 ‘빈 공간’ 연극의 완숙한 실천으로 보였다. 무대 장치가 거의 없는 빈 공간엔 빨간 카펫 하나가 깔려있을 뿐이다. 군데군데 앙상한 둥치의 나무 몇 그루와 빈 의자, 몇 줌의 모래가 오브제의 전부다. 이 빈 공간을 다국적 배우들의 연기가 채웠다. 팔레스타인 배우가 서아프리카 어느 종족의 지도자가 되고, 일본 뮤지션이 음악을 연주했다.

“어떤 빈 공간이든 무대라 할 수 있다. 한 사람이 빈 공간을 가로지르고 그것을 다른 사람이 주시하고 있다면 이미 연극적 행위는 시작된 것이다.”
굳이 피터 브룩의 명저 『빈 공간』의 첫 대목을 상기할 필요가 없다. 연극 ‘11 그리고 12’는 그렇게 빈 공간을 고스란히 드러냈고, 그 속을 종횡무진 횡단하는 몫은 창조적인 플레이의 배우들과 또 하나의 조연, 즉 관객들의 것이었다. 창조적 플레이에는 무대 위의 간소한 오브제들이 동원됐다. 바닥의 붉은 천은 어느 순간 극중 관찰자 겸 주인공 격인 ‘암쿠렐’을 태운 배가 되고 옷자락은 엄마 흉내를 내는 스카프가 됐다.

소박한 스타일의 ‘가난한 연극’을 윤택한 무대로 채우는 것은 오히려 이야기의 힘이었다. 배경은 프랑스가 식민지를 개척하던 1930년대 서아프리카 말리 지역. 수피교를 믿는 신도들에게는 ‘완벽의 진주’라는 기도문을 여러 차례 암송하는 전통이 있다.
어느 날 문제가 발생한다. 원래 기도문을 11번 외워야 하는데 예배 시간에 늦은 스승이 무안할까 봐 한 번 더 외우는 바람에 12번 외우는 것이 새로운 전통으로 굳어진다. 11번 외우는 전통을 고수하는 교도들은 이를 바로잡겠다며 들이닥치고, 이 지역을 식민통치하고 있던 프랑스 당국은 11번의 전통을 고집하는 것이 식민지배에 대한 저항이 아닌지 추궁한다.

두 파벌의 화해를 모색하다 배신자로 낙인 찍혀 죽는 티에노 보카는 제자 암쿠렐에게 이렇게 말한다.
“세상엔 세 가지 진리가 있다. 나의 진리, 너의 진리, 그리고 진정한 진리. 진리는 누구의 것도 아니란다. 중심에 있을 뿐이야. 나의 진리는 너의 진리와 마찬가지로, 진정한 진리의 작은 파편일 뿐이야.”

피터 브룩은 인도의 대서사시 ‘마하바라타’(1985)를 무려 9시간짜리 연극으로 만드는 등 방대한 시공간적인 스케일을 실험한 연극 혁명가다. 이런 그의 파격적인 전력에 비해 1시간30분짜리 ‘11 그리고 12’는 작고 소박했다. 그가 죽으면 연극도 사라지기에 거장의 작은 조각을 직접 감상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시간이었다. 20일까지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를 거쳐 LG아트센터 기획운영부장과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서울예술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공연예술 전문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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