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실천이 어렵다지만, 제대로 알기가 더 어렵다”

중앙선데이 2010.06.19 16:07 171호 8면 지면보기
주자학은 ‘지식’을 핵심 브랜드로 내세웠다. 이 카드 하나로 오랜 불교의 지배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기실 정신의 ‘수렴(收斂)’, 그 노하우에서 유교는 불교와 시쳇말로 잽이 안 된다. 그 정교하고 치밀한 기술은 유교의 ‘심학(心學)’이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다. 주자학은 이를 인정한 다음 조용히 칼을 겨눈다. “그러나 마음의 정화로 충분할까, 삶의 기술로….” 그렇지 않은가. 몸과 마음을 수습하더라도 세상은 여전히 불확실성으로 우뚝 서 있다. 사물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적절한 판단과 가치 있는 행동을 기약할 수 없다. 이것이 주자학의 기본 원리다. 그래서 왈, 이학(理學)이라 부른다.

한형조 교수의 교과서 밖 조선 유학 : 율곡의 성학집요 <10> - 격물치지(格物致知), 오직 ‘지식’을 통해 자유를 얻는다

세계는 마음 밖에 있다
주자학은 항변한다. “누가 삼계(三界)를 유식(唯識)이라 하는가. 세상은 마음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여기 역력히 실재한다.”
율곡은 어느 승려에게 읊어 주었다. “서리 내리면 온 산이 여위고, 바람 따뜻하면 뭇 꽃이 핀다오(霜落千山瘦, 風和百卉開).” 마음은 몸의 일부이고, 몸은 자연의 산물이자 사물들의 형제로 존재한다.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이들 ‘관계와 과정(理)’의 ‘지식’이 필요하다.

주자학은 말한다. “지식은 힘이다.” 사물을 이해한다면 그는 자연스럽게 이들 계기에 튜닝하고, 행동을 선택하게 된다는 것. 그렇지 않고 불교처럼 ‘마음’의 절대성을 믿고 그 속에 유폐될 때 객관성은 저만큼 멀어지고, 저런, 거꾸로 그 마음은 병이 되어 주저앉을 것이다.

주자가 감히 『대학(大學)』을 뜯어고친 이유가 여기 있다. 격물치지(格物致知) 챕터를 보망(補亡), “새로 써 채워놓고” 맥락을 왜곡하면서까지 이 ‘지식’과 ‘탐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한걸음 더 나갔다. “지식이 없다면, 의지의 순수함을 기약할 수 없다!(欲誠其意者, 先致其知, 致知在格物)” “지식이 덕성을 완성시키고 심신의 안정을 공고히 할 것이다.(知識明則力量自進)”

세상은 넓고 사물은 많다
그런데 세상은 넓고 사물은 많다. 이 엄청난 사물을 다 궁구하고, 그 지식을 획득해야 하는가. 원리는 그렇다. “천도(天道) 유행(流行)하여 조화(造化) 발현하는 곳에 성색(聲色)을 갖고 천지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 이 모두가 사물(物)이다.” 이 사물들은 자신의 근원(所以)을 갖고 있고, 그들의 필연성과 구조(當然)를 갖고 있다. 그렇다면 저 우주의 먼 천문학적 지식에서, 미시 세포 내 미토콘드리아까지 다 지적 탐구와 이해의 대상이다. 가정과 사회, 역사와 문화의 지식 또한 빠뜨릴 수 없고, 무엇보다 인간의 마음과 몸의 탐구는 그 핵심 가운데 있다. “가장 가깝고 절실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이치를 탐구하겠다는 기염에도 불구하고 주자학은 실제로는 마음의 근본과 가능성, 그리고 그 발현의 구조에 탐구의 에너지를 집중했다.

이들 ‘지식’은 어떻게 얻는가. 여러 방도가 있다. ‘독서를 통해 길(義理)을 밝히거나’ ‘고금 인물을 논하며 시비를 가리거나’ ‘주어진 사태를 적절히 처리하는 법을 배우거나’ 등이다. 이렇게도 말한다. 사물들의 탐구는 ‘드러난 사태를 고찰하거나’ 혹은 ‘마음의 움직임과 기미를 살핌으로써’ 혹은 ‘문자와 책, 토론과 강의를 통해’ 얻어지고 축적되는 것이다. 지식에 이르기 위해서는 독서와 성찰 등 마음의 기능을 통합 발휘해야 한다.

지식을 밝히고 축적하다
사물을 하나 탐구하면 지식 하나가 생길 것이다. 즉 이(理)가 하나 밝아진다. 비슷한 사물을 만나면 유추(類推)를 통해 이 지식은 더욱 분명해지고 공고해진다. 지식은 또 다른 지식과 만나 시놉시스를 만들며 전체적 그림을 향해 진급되어 갈 것이다. 어떤 ‘사물’은 너무 전문적이거나 혹은 심오해 아직 준비가 안 돼 이가 안 들어가는 것도 많다. 이 부문은 우선 밀쳐 두어서 나중을 기약하는 것이 좋겠다. 다른 지식이 쌓이다가, 혹은 시간에 따라 경험이 성숙되면, 어느 날 밀쳐두었던 이 ‘난공(難攻)’의 지식이 문득 ‘환해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가다가 막히면 기존의 성견(成見)을 통째로 비워주어야 한다. “사실이 의문을 제기할 때 기존의 옛 지식(舊見)을 씻어 내버려야 한다. 그래야 신선한 소식이 들어설 수 있다.(義理有疑, 則濯去舊見以來新意)” 이 축적의 어느 순간, 사물의 전체적 구조와 요건들, 그리고 진행 과정이 일거에 ‘장악되는 순간’이 온다(積累多後, 自當脫然有悟處). 이것이 이른바 ‘할연관통(豁然貫通)’이다. 나머지는 이 경험과 지식을 통해 유추될 수 있는 것이다. 이 경험은 어느 한 전문 부문의 지식일 수도 있고, 세계와 역사, 문명의 거시적 통찰일 수도 있다.

삶의 기술은 자연의 길을 따르는 데 있다
다시 말하지만 사물들이 길을 밝혀줄 것이다. 다만 따라가면 된다. 하등 어렵지 않다. 문제는 마음이 뿌옇게 혼란돼 있어서 길이 보이지 않고, 사적 이해에 국집(局執)돼 있어 발걸음을 가로막는 데 있다. 사람들은 실천이 어렵다고 하나 기실은 ‘진정 알기(眞知)’가 어렵다. “이(理)가 환히 밝혀지면 힘들이지(勉强) 않고도 스스로 즐겁게 이 이(理)를 따르게 된다. 이 지식이 도착하지 않았는데 힘으로 밀어붙이면 즐거움은 사라지고 무리와 괴로움만 겪게 된다.” 놀랄지 모르겠는데, 주자학이 말하는 언필칭 ‘도덕’이나 ‘윤리’ 또한 사물의 길을, 그것이 지시하는 대로 따라가는 데 있다. 역시 과학과 도덕 사이에는 경계가 없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고전한학과 철학을 가르치고 있으며『주희에서 정약용으로』『조선유학의 거장들』 등을 썼다.

구독신청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