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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범근의 ‘남아공 편지’ 중앙일보 독점 게재

중앙일보 2010.06.19 01:48 종합 6면 지면보기
17일(한국시간) 열린 한국-아르헨티나전에서 허정무 감독(오른쪽)과 마라도나 감독이 팔짱을 낀 비슷한 포즈로 경기를 지켜보고 있다. 이날 두 감독은 벤치에서 설전을 벌이는 등 팽팽한 기싸움을 했다. [요하네스버그=연합뉴스]
한국이 아르헨티나에 1-4로 패하자 그리스전 승리의 주체할 수 없었던 기쁨이 순식간에 분노와 질타의 모양으로 바뀌고 있다. 그 중심에 내 아들 두리가 서 있다. 아르헨티나전에 두리를 기용하지 않은 것에 대한 논란이다. 아버지로서 곤혹스럽고 또 한편으로는 마음이 아프다.


“전쟁 중 장수가 힘 잃으면 아무것도 못 해 … 우리 모두 허정무 감독의 결정 존중해야”

그리스전이 끝나자 두리는 내가 있는 중계석을 향해 두 팔을 벌리면서 자랑스러워했다. 나도 엄지를 치켜 보이며 맘껏 축하해 줬다.



그러나 지금은 “네가 감독을 이해하고 힘을 모아야 한다”고 다독거리고 있다. 내가 아들 두리나 우리 대표팀을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는 생각이다.



온 국민이 지금 한국의 16강 진출을 어떤 계산도 없이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물론 애국심이나 민족 자부심 같은 이전의 색깔이 아니고 월드컵을 좀 더 신나게 즐기고 싶은 단순하고 가벼운 욕심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승리를 바라는 국민의 마음은 진심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 해설자로 여기에 와 있다. 나 역시 실패와 성공을 온몸에 무늬처럼 새기며 살아온 축구인으로서 허정무 감독의 입장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동료이기도 하다. 그리고 자랑스러운 국가대표선수 아들을 둔 아버지다.



모든 결정은 감독이 한다.



내가 감독으로서 결정한 모든 일들을 존중받고 싶었듯이 나는 허정무 감독의 결정을 존중하고 싶다. 우리 모두가 그랬으면 한다. 전쟁 중에 장수가 힘을 잃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모두에게 치명적이다.



아르헨티나는 월드컵을 준비하면서 20일 넘게 평가전을 하지 않았다. 선수들의 부상을 막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그래도 베론 선수처럼 부상자가 나오지 않느냐고 유럽의 기자들은 마라도나 감독을 비웃기도 하지만 마라도나의 생각은 부상 선수 없이 몸 관리를 잘하다 조별리그를 통해 경기력을 끌어올리겠다는 생각으로 보였다. 말하자면 예선 통과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20여 일 만의 나이지리아와 첫 경기. 당연히 삐걱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유에서 본다면 우리 팬들이나 선수들이 보고 얻은 자신감은 조금은 위험한 것이기도 했다.



나이지리아전은 아르헨티나 선수들에게는 최상의 훈련 경험으로 쌓여 있었을 거다. 아르헨티나의 위도가 이곳과 같으니 모두에게 불편한 이곳의 날씨도 그들에게는 문제될 게 없었다.



그리스가 나이지리아를 이김으로써 16강으로 가는 티켓 한 장의 싸움은 치열해졌다.



아르헨티나가, 아니 마라도나가 쉬어가자고 생각만 않는다면 더반에서의 한국 승리가 16강 티켓에 도장을 찍어주는 한판이 될 것 같다. 가능성도 크다.



더반은 나이지리아 사람들이 몰려 사는 곳이다. 운동장 분위기도 우리에게는 편치 않을 것이다.



이겨도 져도 노래하고 춤추는 아프리카 사람들의 낙천성이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 어떤 모양으로 나타날지도 고민해봐야 하는 부분이다.



부부젤라를 불어대는 운동장에서 나이지리아 관중에 둘러싸여 쉽지 않은 경기를 해야 하는 우리 선수단에게 앞으로 며칠만이라도 무한한 애정과 신뢰를 모아주었으면 한다.



차범근 [SBS 축구 해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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