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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View 정명훈의 ‘음식 교향곡‘] “한국 사람 ‘빈티지 투니나’ 와인 어떨까요”

중앙일보 2010.06.19 00:19 주말섹션 14면 지면보기
로마네 콩티, 샤토 페트뤼스, 사시카야(왼쪽부터).
많은 사람이 와인을 ‘보르도’로 시작한다. 세계 여러 나라가 비슷하게 만들 수 있는 것도 바로 보르도 와인이다. 하지만 나는 프랑스의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지휘를 맡은 뒤 단원들 때문에 부르고뉴 와인에 푹 빠졌다. 그들이 부르고뉴 와인을 훨씬 좋아했기 때문이다.



사람으로 치면 보르도는 여자고, 부르고뉴는 남자다. 부르고뉴 와인에는 힘이 있고, 보르도와는 완전히 다른 ‘땅의 맛’이 난다. 땅마다 역사가 다르고 와인까지 달라지는 것이 참 묘하다. 부르고뉴에서도 으뜸으로 치는 ‘로마네 콩티’ 같은 와인은 냄새만 맡아봐도 기억이 오래간다. 와인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이 한 병을 다른 몇백 병과도 바꾸지 않는다. 노래 좋아하는 사람들이 “파바로티 한 번 듣는 게, 다른 테너 스무 번 듣는 것보다 낫다”고 말하는 경우와 비슷하다. 사실 파바로티 공연의 티켓 값도 좋은 와인처럼 비싸지 않던가.



아내와 만든 와인 리스트



물론 나도 비싸고 질 좋은 와인을 좋아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중간 정도의 취향이다. 내가 정말 추천하고 싶은 최고급 와인 감별가는 바로 ‘내 아내’다. 아내는 술을 거의 하지 않지만 좋은 와인을 기가 막히게 발견한다. 미감이 타고난 듯하다. 어느 해인가 크리스마스에 ‘샤토 페트뤼스’를 구해 함께 마셨다. 보르도 와인 중 가장 비싼 축에 드는 최고급 와인을 맛본 아내의 말은 어땠을까. “이건 조금 마실 만하다”였다.



많은 경험을 거쳐 우리 부부가 리스트에 올린 와인은 셋이다. 샤토 페트뤼스와 로마네 콩티, 그리고 이탈리아의 사시카야. 여기에서 한 단계 내려가면 솔라야가 좋다. 화이트 와인으로는 가이야&레이의 샤도네이를 추천한다. 이탈리아 특유의 과일 향이 입안에 가득 퍼진다. 한때는 이 와인을 상당히 많이 마셨지만 이젠 너무 비싸졌다. 일 년에 한 번 마실까 말까 할 정도다. 가격에 비해 맛이 좋고 한국 사람 입맛에도 맞는 와인으로는 빈티지 투니나(세계 100대 와인 중 45위 수준)를 추천한다. 조금 달콤하지만 과일 향이 좋다.



프로방스에 있는 우리 집에서 별로 멀지 않은 곳에는 샤토네프 뒤 파프(Chateauneuf-du-Pape)라는 와인 산지가 있다. 14세기에 로마 교황(Pope)이 아비뇽에 연금됐던 역사에서 나온 이름이다. 이곳의 와인은 달콤하면서도 다른 와인에서 맡을 수 없는 묘한 향이 있어 한때 우리 부부의 사랑을 받았다.



둘째 아들의‘와인 재능’



그런데 이런 아내의 재능을 둘째 아들이 물려받았다. 뉴욕에서 본격적으로 공부한 둘째 아들은 소믈리에 코스를 마쳤다. 본업은 재즈 기타리스트이자 작곡가다. 음반 회사를 차려서 본격적으로 음악에 뛰어들었다. 음악을 시킬 생각이 없었는데도 자연스럽게 이쪽으로 온 것은 나를 닮은 것 같다. 하지만 와인을 알아보는 감각은 아내와 똑같다. 둘째 아이는 어려서부터 마른 편이었다. 우리는 둘째에게 뭐든지 많이 먹이려 무던히도 애썼다. 첫째와 셋째가 아무거나 잘 먹고 쑥쑥 자랄 때도 혼자 까다로웠다. 7~8세 때부터 아이는 학교가 끝나면 집에 전화를 했다. “오늘 뭐 먹어요?” 무서운 말이다. 맛이 있어야 먹지 절대 아무거나 먹지 않겠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예쁜 것을 골라내는 재능이 있는 것도 둘째다. 정원에 나가면, 나무·꽃·과일이 아무리 많아도 그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꼭 찾아낸다. 신중하고 집중력이 뛰어났다. 여섯 살쯤 됐을 때 처음 활을 쥐고도 과녁의 중간을 맞히고, 자전거도 처음부터 잡아줄 필요가 없었다. 운동에 완전히 재능이 없었던 셋째와 비교해 보면 놀랄 일이다. 이처럼 여러 감각이 발달해 맛에도 민감한 것이 아닌가 싶다.



와인도 맛없는 것은 절대 먹지 않는 둘째에게 소믈리에 과정은 공부라기보다 즐거움이었다. 이제 아내도 둘째를 믿고 와인 선택을 완전히 맡기게 됐다. 프랑스에서 어린 시절부터 자란 것도 ‘와인 감각’에 영향을 줬을까. 프랑스의 언어를 잘 아는 사람들이 라벨·드뷔시의 음악을 정확하게 느낀다. 언어와 음악은 소리라는 점에서 같다. 와인도 마찬가지다. 와인이 나는 땅에서 나는 음식을 일평생 먹은 사람들은 와인의 맛도 더 감각적으로 받아들인다.



이달 말 나는 프랑스 오케스트라 단원 몇 명과 함께 와인이 나오는 동네에서 연주를 한다. 클로 드 부조(Clos de Vougeot)라는 곳이다. 와인에 정통한 몇 명의 단원이 주선한 연주다. 우리는 여기에서 작은 실내악 무대를 펼칠 생각이다. 브람스 피아노 4중주를 연주하고 동네 사람들과 함께 와인을 마시는 파티 음악회다. 이 동네에는 매년 연주자들이 찾아와 와인 시음회와 연주회를 동시에 연다고 한다. 좋은 와인을 맛볼 생각에 벌써 마음이 설렌다.



정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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