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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Global] 정자은행

중앙일보 2010.06.19 00:13 주말섹션 12면 지면보기
오늘날 ‘정자은행(Sperm Bank)’은 더 이상 ‘불임 부부의 희망’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상적인 2세의 모습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곳이다. 미국 최대의 정자은행 ‘캘리포니아 크라이요 뱅크(CCB) 인터넷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클릭 한 번으로 성별은 물론, 생김새·체형·머리카락 색깔까지 ‘맞춤형 정자’를 고를 수 있다. 따라서 우수한 정자를 찾는 수요자는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CCB가 혹독한 불경기 속에서도 성장세를 거듭하고 있는 이유다. CCB의 스콧 브라운(42) 홍보부장은 “정자은행은 불황을 모르는 ‘백색 금광’”이라고 평가했다. 정자은행의 현주소는 물론, 과거와 미래까지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CCB를 가 찾았다.


이상적인 2세 낳고 싶은 인간의 욕망, 이곳에서 이뤄진다 - 캘리포니아 크라이요 뱅크

LA지사=정구현·신혜림·김정균 기자





‘기증자’ 되기, 하버드 입학보다 어렵다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서부에 있는 UCLA 메디컬 센터 인근에 위치한 CCB. 겉으로는 평범한 사무실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다. 하지만 내부에 들어서면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안내 데스크부터 복도 벽, 실험실까지 정자를 상징하는 표식이 사방에 널려 있다. 직원들이 사용하는 펜, 데스크톱 바탕화면에까지 정자가 그려져 있다. 한인들은 낯 뜨거워 말도 꺼내지 못하는 정자의 이미지를 이곳에선 장식품이자 홍보물로 적극 이용하고 있다.



1층 접견실을 통과하면 5개의 ‘기증실(Lab)’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방 안에는 성인용 DVD, 사진, 잡지 등 시각 자료와 세면 시설이 갖춰져 있다. 이 방에는 아무나 들어올 수 없다. 기증자가 되기 위해서는 엄격한 1차 기준을 우선 통과해야 한다. 나이는 19~39세, 키는 5피트 9인치(1m75㎝) 이상, 4년제 대학 졸업자 등이 기본 요건이다.



1차 심사로 한 차례 걸러진 기증 희망자들은 6개월간 7단계에 거친 검사와 선별작업 등 까다로운 절차를 통과해야 비로소 최종 기증자로 ‘간택’될 수 있다. 검사기간을 6개월로 잡은 이유는 에이즈 등 각종 질병의 잠복기를 고려해서다.



브라운 부장은 “CCB에서는 기증 희망자 1000명 중 단 9명, 0.9%의 선택된 소수만이 기증자가 될 수 있다”며 “하버드 대학에 들어가기보다 어렵다고들 한다”고 말했다.



엄선 과정을 통과한 기증자 명단 중에는 한인도 있다. 올 6월 현재 공개된 기증자는 총 307명으로 이 중 11명이 한인이다. 브라운 부장은 “대부분 명문대 학생”이라며 “전체로 볼 땐 3.5%에 불과하지만 아시아 출신(45명) 중에는 25%로 중국계 다음으로 많다”고 전했다.



기증 희망자에게서 수집된 정자들은 운동성, 모양, 질병 유무 등을 검사하기 위해 실험실로 옮겨진다. 적합 판정을 받은 정자들은 특수 제작되고 살균 처리한 작은 유리관 ‘바이얼(Vial)’에 각각 0.4~1mL씩 담겨 번호표를 달아 정자 보관실로 보내진다. 번호표는 정자의 상품명이 된다.



바이얼들은 1층 후문 쪽에 있는 정자 보관실에 보내진다. 건물 내 유일한 출입제한 구역이다. 보안장치가 설치된 문을 열고 들어서면 축구장 4분의 1 크기의 넓은 방 안에 12개의 은빛 탱크가 반짝거리며 줄지어 서 있다. 정자가 보관된 질소 냉동탱크들이다. 브라운 부장은 “탱크 한 개당 2만5000여 개의 바이얼이 저장돼 있다”며 “총 10만 명에게 판매될 수 있는 양의 정자가 12개 탱크 안에서 동면 중”이라고 설명했다.



탱크의 자동 온도조절 시스템은 저절로 액체질소를 채워 최적 온도인 섭씨 영하 196도를 유지시킨다. 세포 손상을 막기 위해서다. 냉동된 정자는 수십 년 후에 해동해도 다시 살아난다.



정자보관실의 골격은 다중 철제 빔으로 지어져 지진에도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됐다. 브라운 부장은 정자보관실의 안전성을 “거대한 강철 새장”이라고 표현했다.



보관실에서 잠자던 정자들은 고객의 주문을 받으면 운송 준비에 들어간다. 잠수용 산소통처럼 생긴 액체질소 충전용기에 담긴 정자들은 미국 내는 물론이고 35개 나라로 수출된다. 주요 정자 수입국은 자국에 정자은행이 존재하지 않거나 정자 판매가 법적으로 금지된 나라들이다.



CCB는 지난해 창사 이래 처음으로 한국에도 한인 남성의 정자를 수출했다. 운송 담당 직원은 “2009년 8월 경기도 일산의 한 종합병원과 개인 병원에 각각 5개, 2개의 바이얼을 수출했다”고 전했다.



바이얼의 가격은 개당 500~600달러다. 통상 35세 이하 여성이 임신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평균 4개의 바이얼이 사용된다. 한 차례 임신을 위해선 2000~2400달러를 지불해야 하는 셈이다. 브라운 부장이 “정자는 미래의 ‘백색 금괴(white gold)’”라고 말하는 게 과장이 아니다.



2층 사무실과 실험실을 끝으로 시설 견학을 마치면서 브라운 부장은 한쪽 벽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그동안 CCB를 방문한 언론사 기자들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중앙일보는 한국 신문으로는 처음 그 벽 한쪽에 사진을 남겼다.



CCB 기증자와 ‘자녀’와의 만남



“18년 만에 처음 만난 두 사람은 누가 봐도 부자지간이었어요. DNA의 힘을 새삼 실감했죠.”




최근 정자은행업계에서는 정자 기증자와 기증된 정자로 태어난 자녀 간 상봉을 주선하고 있다. 흔치 않은 만남이다. 일단 기증된 정자로 태어난 자녀가 18세가 지나야 하고 아이, 친모, 정자 기증자 모두 동의해야 하기 때문이다. CCB에서도 얼마 전 18년 전 정자를 기증했던 남성과 그 정자로 태어난 18세 대학생이 만났다.



그 자리에 동석했던 스콧 브라운 홍보부장은 “평생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두 사람이 생김새는 물론이고 말투, 제스처까지 닮아 있었다”며 “헤어스타일과 좋아하는 패션, 쓰고 온 색안경까지 취향이 비슷했다”고 소감을 전했다.



생물학적 부자(부녀) 간 만남 주선은 정자은행업계가 세태 변화에 대처하기 위한 일환이다. 주 고객층이 바뀌고 요구조건도 다양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CCB 설립자인 카피 로스먼(74) 박사는 “1980년대까지 고객의 90%가 불임부부였지만 지금은 65%가 레즈비언 커플”이라고 말했다. 또 죽은 남편의 정자를 채취해 미망인의 임신을 돕기도 하고, 전쟁 참전 군인들의 정자를 무료로 보관해 주기도 한다.



정자 보관을 넘어 제대혈 보관으로까지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제대혈은 출산 시 태반과 탯줄에 남아있는 혈액을 말한다. 현재 가동 중인 24개 질소냉동탱크 중 절반이 제대혈 보관용이다.



CCB는 또 다른 차세대 사업으로 난자은행을 꿈꾸고 있다. 난자는 냉동 시 정자에 비해 세포가 훼손되기 쉬워 보관이 어렵다. 로스먼 박사는 정자은행이 상업적이기보다는 가족을 선물하는 생명의 기업이 되어야 한다는 경영철학을 가지고 있다. 그는 “기증자 1명을 확보하면 최대 35쌍의 커플에게 잉태의 감격을 안겨줄 수 있다”며 정자 기증 문화 정착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캘리포니아 크라이요 뱅크(CCB)는



1977년 센추리시티의 한 병원 내 연구실에서 불임 치료를 목적으로 카피 로스먼(74) 박사에 의해 설립됐다. 현재 UCLA 메디컬센터 인근의 본사를 중심으로 캘리포니아주 2곳, 뉴욕 2곳, 매사추세츠, 라스베이거스 등에 6개 지사를 두고 있다. 본사 직원 수는 130여 명이며 이 중 2명이 한인이다. 미국 내 시장 점유율 35%를 차지, 정자은행 업계의 ‘코카콜라’로 불리며 선두 자리를 지키고 있다. 로스먼 박사에 따르면 지난 34년간 CCB가 보유한 정자로 태어난 아기는 4만여 명에 달한다. 





·CCB의 정자보관실은 다중 철제 빔으로 지어져 거대한 지진도 견딜 수 있다. 자동온도조절 시스템은 온도가 내려가거나 올라가면 자동으로 액체 질소를 채워 정자들의 세포 손상을 막는다. (사진 左)



·기증실에 걸려 있는 ‘성인 사진’ 시각 보조물. (사진中)



·수집된 정자들은 특수 살균 처리된 수집 유리관인 ‘바이얼(Vial)’에 담긴 채 섭씨 영하 196도의 질소 냉동탱크에 보관된다. CCB는 1개당 2만5000여 개의 바이얼을 저장할 수 있는 탱크 12개를 보유하고 있다. 이는 10만 명의 여성을 잉태시킬 수 있는 양이다. (사진 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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