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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Story] “오늘날 한국의 건물·사람 안 믿긴다”

중앙일보 2010.06.19 00:13 주말섹션 2면 지면보기
미국 워싱턴 DC에는 수천 명에 달하는 세계 언론인들이 몰려 있다. 백악관 옆 도심 한복판에 있는 내셔널 프레스 빌딩 13층의 내셔널 프레스 클럽은 이들의 사교 장소다. 매일 유명인사들이 찾는 클럽 로비 오른쪽에 한국전쟁 당시의 ‘폭파된 대동강 다리’ 사진이 걸려 있다. 단 한 장의 사진으로 두 말이 필요 없는 한국전쟁의 참상을 보여준, 그래서 찰나를 영원으로 기록한 이 사진의 주인은 AP통신 한국전쟁 종군기자 맥스 데스퍼(97)다. 이 사진으로 1951년 미국 언론 최고의 영예인 퓰리처상을 수상한 데스퍼가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19일 한국에 온다. 그가 기록한 한국전쟁 사진을 모아봤다.  

비탄의 흥남 부두 챙길 수 있는 건 육신과 한 보따리의 가재도구뿐. 1950년12월 20일 함경남도 흥남시에서 북한주민들이 피란민용 상륙함에 타려고줄지어 서 있다. 당시 중공군에게 포위된 한국군·미군 등을 구출하려고 작전명 ‘크리스마스 카고(cargo)’인 흥남철수 작전이 벌어졌다. 삶의 터전을 등지고 떠나는 피란민들은 우리의 할아버지·할머니들이었다.
워싱턴=김정욱 특파원

한국전 전장 누빈 종군기자, 맥스 데스퍼
“쓰러진 엄마 옆 울부짖는 두 아이 … 찢어지는 가슴 억누르며 셔터 눌렀다”

사진=맥스 데스퍼/AP

사진=워싱턴 중앙일보 김진석 기자





1950년 6월 첫째 주 그는 고향 뉴욕 땅을 밟았다. AP통신 국제부 소속 사진기자로 전 세계 분쟁지역을 누빈 지 약 10년 만이었다. 오랜만에 맛보는 평화로움, 그는 마이애미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그가 좀 더 편하게 쉴 수 있도록 회사가 플로리다 지사 발령을 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달 25일 북한군은 38선을 넘었다. “한국으로 달려가겠습니다.” 상사에게 말했다. 그러나 상사는 말렸다. “맥스, 그럴 필요 없네. 전쟁은 2주 안에 끝날 거야. 우리가 이긴다고.”



며칠 뒤 상사가 무거운 목소리로 다시 맥스를 불렀다. “지금도 한국에 갈 생각이 있나?” 그의 대답은 길지 않았다. 곧바로 가족이 함께하는 마이애미행 비행기 대신 무거운 카메라만 들고 도쿄행 비행기를 탔다. 한국전쟁 발발 2주가 채 되지 않아 그는 미군들과 함께 한국에 도착했다. 이후 3년이 넘도록 사선(死線)을 넘나들며 카메라 셔터를 누르게 될 줄은, 그래서 전쟁의 참상과 비애를 온몸으로 느끼게 될 줄은, 당시의 그는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8일 오후 메릴랜드주 실버스프링에 살고 있는 한국전쟁 종군기자 맥스 데스퍼를 찾았다. 마음씨 좋게 생긴 할아버지가 빙그레 웃으며 아파트 문을 열었다. 그의 방에서 ‘폭파된 대동강 다리’ 사진을 보지 못했더라면 치열했던 그의 45년 기자 인생을 믿기 어려웠을 것이다.



● 한국에 도착하니 전쟁 상황은 어땠나.



“부산을 통해 한국에 도착한 뒤 주로 미 3사단을 따라 38선을 넘었다. 그러나 때로는 한국군, 영국군, 터키군과도 함께 움직였다. 전쟁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알리려면 반드시 현장에 있어야 했으니까. 상황이 위급할 때는 기자도 어쩔 수 없었다. 50년 10월 20일 간단한 교육만 받고 700피트 상공에서 낙하산을 이용한 전투 점프를 하기도 했다. 카메라가 부서질까 봐 노심초사했던 기억이 난다.”(그의 방에 보관된 미군 인증서에는 그가 2차대전 이후 전투 낙하를 했던 처음이자 마지막 종군 기자라고 기록돼 있었다.)



● 당신을 유명하게 만든 대동강 다리 사진은 언제 찍은 것인가.



“나는 미군을 따라 압록강 근처까지 갔다. 그런데 중공군이 물밀 듯 내려왔다. 우리는 후퇴에 후퇴를 거듭했다. 미군은 평양 포기를 결정하고 중공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 대동강 철교를 폭파시켰다. (중공군의 개입은 50년 11월 말에 시작됐고, 워커 미 제8군 사령관은 12월 4일 평양 포기 결정을 내렸다).



상황이 급박해져서 나를 포함한 기자 3명은 지프를 타고 미군이 부설해놓은 주교(舟橋)를 통해 대동강을 건넜다. 그러나 대동강 북쪽의 피란민들은 그럴 수가 없었다.”



● 당시 상황을 기억할 수 있는가.



맥스 데스퍼. [사진=워싱턴 중앙일보 김진석 기자]
“어떻게 그 처참했던 광경을 잊을 수가 있겠는가. 강 남쪽에 도착해 뒤돌아보니 수천 명의 한국인들이 머리에 봇짐을 인 채 부서진 다리 난간을 붙잡고 필사적으로 탈출하고 있었다. 날씨는 매섭게 추웠지만 얼음을 타고 내려오기는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몸을 가누지 못하고 난간에서 떨어지는 사람들…. 강 북쪽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 공포에 질리고 울음을 터트리면서도 오직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건 그들의 모습을 보자마자 나는 다리 남쪽 난간을 붙잡고 올라가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데스퍼는 현장에 있었던 유일한 사진기자였다. 그는 피란민들을 두고 지프로 이동했던 상황이 지금도 마음에 걸리는 듯 여러 차례 “손이 얼어붙을 정도로 추웠고 단 8장의 사진밖에 찍을 수 없을 정도로 급박한 상황이었다”고 회고했다.



● 사진을 어떻게 전송했나.



“나는 그대로 한국에 남고, 일본 오키나와 기지로 가는 인편에 필름을 맡겼다. 일본의 AP지사가 이를 받아 그 한 장의 사진을 골라 전 세계에 알리게 된 것이다.”



● 퓰리처상 수상 소식은 언제 알았나.



“그 과정은 좀 우습다. 내가 회사에 잠시 휴식을 위한 종군기자 대체를 요청해 일본 온천여관에서 며칠 쉬고 있을 때였다. 아무도 내가 있는 곳을 알리지 않았는데 종업원이 급한 전화가 왔다며 바꿔줬다. 내가 퓰리처상을 받았다고 회사 동료가 말하기에 ‘야이 자식아, 앞으로 그런 장난 한번만 더하면 나 한국에 안 돌아간다’고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랬더니 또 전화가 왔다. AP 본사 편집국장이었다. 그가 ‘전화 끊으면 죽을 줄 알라’고 하더니 수상 내용을 읽어줬다. 51년 4월의 일이었다.”



● 한국전쟁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또 있다면.



“군인은 그렇다 치고 아무런 방비 없는 일반 시민들이 죽고, 다치고, 가족을 잃는 것을 보는 것은 정말로 가슴 아픈 일이다. 평양 인근으로 기억한다. 부상을 당해 숲 속 한 귀퉁이에 누워 죽어가고 있는 엄마를 붙잡고 울부짖는 두 어린아이가 보였다. 여자아이는 다섯 살, 남자아이는 두 살쯤 됐을까. 나는 가슴이 찢어지는 느낌을 억누르면서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데스퍼는 한국전 이후 뉴욕으로 귀환했다 68년부터 12년간 다시 일본에서 AP 아시아지역 책임자로 일했다. 74년 포드 대통령 방한 취재, 77년 한국전 종군 순직기자 추념비 제막식 참가에 이어 99년과 2000년 한국전 관련 행사 참가 등으로 네 차례 한국을 방문했다.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데스퍼에겐 단 한 명이라도 대동강 다리 사진 속의 인물을 만나보고 싶은 소망이 있었다. 그 소망은 한국 정부와 언론의 도움으로 99년 이뤄졌다. 그는 “이제는 나처럼 노인이 된 한국 남성을 만나 손을 잡고 서로 감개무량해했다”며 “뉴욕에 정착한 그의 아들로부터 전화도 받았다”고 말했다.



● 10년 만에 한국을 방문하는 소감이 어떤가.



“50년대 폐허가 된 한국을 떠난 뒤 갈 때마다 깜짝 놀란다. ‘아름다운’ 건물들, ‘살찐’ 사람들(웃음), 사실 나는 이런 변화가 잘 믿기지 않는다. 이번에도 또 어떤 변화가 있을까 많이 기다려진다.”



데스퍼의 종군기자 경력은 한국전이 처음이 아니다. 그는 1939년 국제부 소속으로 발령난 이후 제2차 세계대전(1941~45년), 네덜란드-인도네시아 전쟁(46년), 인도-카슈미르 분쟁(47년) 등 다양한 형태의 전쟁을 취재했다. 한국인으로서는 잊을 수 없는 1945년 히로시마 원폭 투하 현장과 미군 미주리호 함상에서의 일본 항복 서명 현장에도 그가 있었다.



46년 그가 뭄바이에서 찍은 네루와 간디의 환담 사진은 인도에서 지금도 사용 중인 우표 속에 담겨 있다. 우표 덕에 아직도 돈을 벌고 있는 것 아니냐는 농 섞인 질문에 “저작권은 AP에 있다”며 웃었다. 그는 퓰리처상 외에도 이스트만 코닥상 등을 수상했으며 미국 사진기자협회장도 지냈다.



● 어떻게 해서 기자라는 직업을 선택했나.



“여섯 살 위의 둘째 형이 AP통신 뉴욕 본사의 포토 아티스트로 일했다. 형이 AP 사진부에 자리가 났다고 하기에 스무 살 때 사진부 ‘심부름 소년’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기자들이 주는 사진들을 나르고, 암실작업을 도우면서 사진을 배워나갔다. 일찍 결혼한 친구의 아이들을 찍어주면서 실습도 했다. 5년이 지나 사진기자로 승격해 볼티모어 지국에서 첫 근무를 시작했다.”



● 사진을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기자는 무엇보다도 객관적이어야 한다. 진실을 알리려면 절대로 한쪽 편에 서서는 안 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사진의 매력에 끌렸다. 늘 카메라가 모든 걸 말해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게 내가 사진기자를 선택한 이유였고, 지금도 후회 없는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인 배경으로 보자면 큰형도 NBC 방송 영상책임자를 지내는 등 카메라와 인연이 많았다.”



●그렇다면 사진기자 중에서도 왜 종군기자를 여러 차례 자원했던 것인가.



“뉴스가 있는 곳을 찾아서 그 스토리를 전하는 것이 내 일이었다. 당시 위험한 곳에 뉴스가 많았다. 그래서 국제부 소속으로 일하면서 분쟁이 생긴 지역마다 취재를 자원하고 나선 것이다. 돌이켜 보면 운이 참 좋았다. 한국전쟁에서만 19명의 기자가 사망했다. 내 바로 옆자리에 있던 사람이 죽은 경우도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심하게 위험했던 적이 없었다.”



데스퍼의 말은 그의 연륜이 묻어나는 듯 빠르지 않았다. 어떤 일도 담담하게 회상했다. 그런 그가 두 시간여 동안의 대화를 마치고 기자가 일어섰을 때 딱 한마디 질문을 던졌다.



“한국인들은 왜 전쟁 발발일을 성대하게 기념하지요? 그보다는 전쟁 종전일을 더 크게 기념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우리는 이 말을 가슴에 새겨둘 필요가 있다.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가 오는 그날이 1950년 6월 25일을 대체할 수 있을 때까지 말이다.  






j 칵테일 >> 97세 데스퍼 "기자들 끼리 낮술 한 잔 할텐가”



맥스 데스퍼는 각종 서적·교과서 등에 등장하는 간디(오른쪽)와 네루의 사진 작가로도 유명하다. 1946년 7월 6일 인도 뭄바이에서 찍은 이 사진은 인도에서 우표로도 발행됐다.
데스퍼의 아파트에는 거실과 부엌 두 군데나 술이 가득한 이동식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97세의 노인이 88세의 부인 셜리와 단둘이 사는데 이렇게 많은 술이 왜? 장식용인가 싶었지만 혹시나 해서 물었더니 “매일 저녁 둘이 한 잔씩 술을 마신다”는 답이 돌아왔다. 데스퍼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술”이라며 켄터키 산 버번 위스키를 꺼내 보인 뒤 “기자는 보통 세계 어느 나라나 술을 잘 하던데 낮술 한 잔 하겠느냐”며 웃었다.



그의 나이를 의식하고 인터뷰 성사 여부를 걱정했던 터라 술 이야기가 나오자 내친김에 그의 건강 비결을 물었다.



데스퍼는 “잘 먹고, 지나치게 걱정하지 않는 것”이라는 모범 답안을 내놨다. 거기에 한 가지 더 “지금까지 즐겨왔던 많은 것들에 대해 관심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카메라를 예로 들었다. “기자로 일할 때는 손으로 일일이 감아 돌려야 하는 옛날 아날로그식 대형 카메라를 사용했지만 지금은 디지털 카메라 촬영을 즐긴다. 모든 게 자동이라 노출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서 좋다. 주로 좋은 풍경이나 꽃들, 그리고 증손자들을 찍는다.” 데스퍼는 자신을 촬영하는 사진기자의 모습을 찍으며 즐거워했다. 세상에 대한 그의 관심은 아파트 내부 곳곳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세계를 누비며 취재 전선에 나섰을 때마다 조금씩 구입한 물건들이 가득 했다. 한국에서 구입한 전통 문갑과 고려청자를 비롯해 일본, 캄보디아, 발리, 인도, 싱가포르 등에서 구입한 미술품과 생활 소도구들이 동양 냄새를 물씬 풍겼다.



부인 셜리는 남편의 건강 비결에 대해 “좋은 유전자가 첫째”라고 끼어들었다. 데스퍼의 가족력을 들으니 그럴 만했다. 99세의 누나가 지금도 캘리포니아에서 살고 있고, 그 위의 세 형들도 모두 장수했다고 한다. “누나가 요즘 건강이 별로 좋지 않아 걱정”이라고 말하는 데스퍼에겐 한 명의 아들과 네 명의 손자, 그리고 세 명의 증손자가 있다.



맥스 데스퍼 연보

1913년 뉴욕 출생

1933년 뉴욕 브루클린대 1학년 재학 중 AP통신 사진부 ‘심부름 소년’ 입사. 이후 45년간 AP통신 근무

1938년 AP통신 사진기자로 승격. 볼티모어 지사 발령

1939년 AP통신 워싱턴DC 지사 발령. 국제부 소속으로 해외 취재 담당

1941~49년 제2차 세계대전, 네덜란드-인도네시아 전쟁, 인도-카슈미르 분쟁 등 취재

1949~50년 6월 이탈리아 로마 특파원

1950년 7월~53년 한국전쟁 취재. 51년 4월 퓰리처상 수상

1954~68년 AP통신 뉴욕 본사 근무

1968~80년 AP통신 아시아지역 책임자로 일본 지사 근무

1981~85년 시사잡지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



사진담당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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