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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하고 갈등하는 인간들이 만들어 낸 순애보

중앙선데이 2010.06.13 03:30 170호 4면 지면보기
춘향이와 사랑한 건 이몽룡이 아니라 방자였다? 이것만으로는 ‘발칙한 상상력’ 혹은 ‘전복의 미학’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뭐가 더해져야 할까. 3일 개봉한 ‘방자전’의 각본과 연출을 맡은 김대우 감독도 비슷한 고민에 사로잡혔던 듯하다. “신분이 다른 두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한 이야기를 해 보고 싶었고, 『춘향전』 같은 훌륭한 원전이 있는데 활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지만 원작 비틀기와 재해석은 녹록지 않았다. “각색을 하면 할수록 원작이 수백 년에 걸쳐 가졌던 이야기로서의 힘을 실감했다. 경외심마저 느꼈다”는 그의 고백은 그래서 나온 것일 터다.

회의하고 갈등하는 인간들이 만들어 낸 순애보

‘방자전’은 꽤 괜찮은 ‘스핀 오프’(일종의 외전)다. 원작이 갖는 힘이 양반 자제와 기생 딸이 맺어지는 대중적인 결말에서 나왔다면 ‘방자전’의 매력은 그 결말을 순애보 형식으로 변주한 데서 발휘된다. 순애보라고 해서 누군가의 맹목적인 희생을 그리는 단순한 구성이 아니다. 감독은 “사랑은 모순의 복합체라는 사실을 얘기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방자(김주혁)와 춘향(조여정)의 사랑은 춘향의 야심과 몽룡(류승범)의 계략에 의해 시험대에 올려진다. 또 방자의 우유부단함 탓에 야반도주 같은 드라마다운 결말이 아닌 춘향이 사고로 아이의 지능을 갖게 된다는 전혀 엉뚱한 결론으로 막을 내린다. 순애보를 떠받치는 인물들의 면면을 입체적으로 그려 낸 점도 ‘방자전’이 돋보이는 이유다. ‘방자전’의 인물들은 모 아니면 도 식의 선택을 하는 전형적 주인공이 아니라 끊임없이 회의하고 갈등하는 인간 본성이 그대로 반영된 캐릭터다. 춘향은 몽룡을 발판 삼아 계급 상승을 노리는 야심가이지만, 그렇다고 방자의 순정을 깡그리 짓밟지는 못한다.

김주혁의 큰 덩치와 남자다움을 십분 활용한 듯한 캐릭터 방자는 순간순간 몽룡의 오만함에 울컥하지만, 춘향을 업고 야반도주할 만큼의 커다란 배포를 지니진 못했다. 몽룡은 병적이리 만치 자존심이 세다. 그놈의 자존심 때문에 원작이 완전히 뒤틀릴 정도로. 그런가 하면 변학도(송새벽)와 마 노인(오달수)은 ‘원전 뒤집기’라는 만만찮은 프로젝트를 무난하게 굴러가게 해 주는 윤활유다.

변학도는 무리한 수청을 요구하는 탐관오리가 아니라 오로지 여성 편력을 제대로 충족시키기 위해 과거 급제를 노린 집념의 남자에 가깝다. “전 목표가 뚜렷해요” 식의 대사는, 송새벽 특유의 어눌한 화술과 결합하면서 객석을 시쳇말로 빵, 터지게 만든다. 봉준호 감독의 ‘마더’에서 원빈이 입에 문 사과를 발차기하는 형사로 나온 그 배우다. 출연 분량은 많지 않지만, 세 주인공 못지 않은 존재감을 자랑한다. 차게 굴기, 뒤에서 보기, 툭 치기, 은꼴편(은근히 꼴리는 편지) 등 마 노인의 여성 공략법은 참으로 귀여운 상상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2006년 ‘음란서생’으로 성공적인 데뷔식을 치렀던 김대우 감독은 내관의 입을 통해 “성공하려면 개성이 있어야 돼, 그 사람만의 이야기랄까”라고 말한다. 이 대사를 ‘방자전’으로 수평 이동할 수 있지 않을까. ‘방자전’만의 이야기가 없었다면 아무리 방자와 춘향의 격정 베드신이 있다고는 해도 개봉 열흘 만에 벌써 200만 관객을 넘보긴 힘들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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