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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생활 20년 만에 꽈리 꽃에서 머나먼 고향을 보다

중앙선데이 2010.06.13 03:29 170호 4면 지면보기
“그저께는 찬비 내리고 어제는 바람 불었다. 오늘은 또 어떤가. 안개 걷히고 해가 떠오른다.”재미동포 작가의 연작소설집 『꽈리열매 세탁공장』(이언호 지음, 문학수첩)을 들추자 이 구절이 바로 눈에 들어왔습니다. 묘하게 끌렸습니다. 꼬일 대로 꼬인 사랑 이야기도 아니고, 지나치게 진지한 소설도 아닐 거라는 짐작이 들었기 때문이죠. 나름 인생의 단맛·쓴맛을 본, 그러니까 마흔 줄 넘은 이들이라면 공감이 가는 이야기지 싶었습니다.

김성희 기자의 BOOK KEY: 소설 『꽈리열매 세탁공장』

소설은 20여 년 전 미국에 이민 간 이민 1세대의 삶을 소재로 한 겁니다. 솔직히 완성도는 요즘 한다 하는 젊은 소설가들의 솜씨에 못 미칩니다. 12편의 이야기가 실렸는데 구성의 묘를 살리지 못하고 에피소드를 나열했다는 느낌을 줍니다. 그나마 이야기가 연방 다른 데로 빠지는 바람에 몰입을 방해하니까요.

대신 지어낸 이야기 같지 않은 진솔함과, 이민 후에도 희곡을 중심으로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해온 작가의 빼어난 입담 덕에 책을 한 번 잡으면 놓지 못하게 합니다. ‘식초 마신 고양이상’이니 ‘소갈머리는 밴댕이 항문 같고’ 등 삶의 무게를 느끼게 하는 대목들이 나오니까요.

묘사만 맛깔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뭉클하고 짠한 이야기가 그득합니다. 주인공 태명호 부부가 하는 세탁소 간판 아래 둥지를 튼 비둘기 부부를 다룬 ‘비둘기의 눈’이 그렇습니다.

알을 품은 암비둘기가 무더위에 지쳐 모이는커녕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는 걸 본 남편은 물통과 땅콩을 가져다 바칩니다. 한데 그 아내는 한술 더 뜹니다. “산모가 땅콩만으로 살 수 있겠어요?”라며 건포도 섞인 시리얼을 사들이고 선풍기를 달아주려고 나서지요. 그러고는 “너희 밥은 내가 책임진다. 밥걱정 말고 2세가 알을 잘 까고 나오도록 정성을 다해라”고 당부합니다. 부모 마음을 의탁한 것이지 싶습니다. “이민 1세는 벌레처럼 일하다 지쳐 쓰러진, 더없이 불쌍한 인생”이라면서도 “우리는 썩는 밀알이어야 함을 잘 안다. 좋은 땅에서 2세들을 위해 잘 썩어 주어야 좋은 싹이 나옴을 알고 있다”는 대목이 나오거든요.

일하다 갑자기 쓰러져 의식을 잃은 아내를 구급차에 실어 보내고도, 손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세탁소를 떠나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는 장면에서는 마음이 짠해집니다. 주요 등장인물인 주인공의 친구 홍달이 딸을 시집보내며 털어놓는 이야기는 또 어떻고요. 우리네 풍속에 따라 함이 들어오는 날, 시끌벅적한 광경에 신고를 받은 경찰이 출동할 만큼 바깥이 시끌벅적한 가운데 혼자 술잔을 기울이던 홍달이 주인공에게 그럽니다. “이민 와서 살기 힘들고 짜증나는 바람에 악다구니만 부리느라 감수성 예민한 아이들에게 제대로 사는 모습을 보여주지도 못하고 세월에 밀려 어느덧 시집을 보내게 됐다”고요.

향수를 그린 대목도 찡합니다. 소설집의 제목이 된 꽈리 이야깁니다. 교민 집에 갔다가 이민 온 후 처음 본 고향의 식물 두 뿌리를 얻어온 부부는 키우느라 애면글면합니다. 깜박 잊고 왔을 때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 볕 가리개를 챙겨줄 정도로요. 그러면서 꽈리농장 CEO를 꿈꾸는 것이 영 허튼소리로 읽히지 않습니다.
책을 덮으며 든 생각은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랄까요. 아니면 헤밍웨이 소설 제목처럼 ‘그래도 해는 떠오른다’ 같은 느낌입니다. 친구와 가족의 소중함을 되새기기에 적합한 소설입니다.




경력 27년차 기자로 고려대 초빙교수를 거쳐 출판을 맡고 있다. 책은 분야를 가리지 않고 다 좋아한다. 『맛있는 책읽기』등 3권의 책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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