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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전 이길 것 확신, 잔치국수 준비했지요”

중앙선데이 2010.06.13 00:57 170호 8면 지면보기
축구대표팀의 식단을 책임지는 김형채 조리장의 가슴에도 대한축구협회의 호랑이 문장이 선명하다. 그는 선수들이 먹는 음식도 전략이라고 믿는다. 선수들은 조기구이(작은 사진 왼쪽)와 비빔밥 등 한국식단을 즐겨 먹는다.
“여기는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오스트리아 노이슈티프트 야크트호프 호텔. 선수단 숙소가 있는 메인 건물에서 30m가량 떨어진 곳에 작은 별채가 있다. 한국 대표팀을 위해 호텔 측이 제공한 주방이다.

대표팀 ‘식탁 사령탑’ 김형채 조리장

축구 감독들은 기자들이 구둣발로 그라운드에 들어오는 걸 질색한다. 국가대표팀 김형채(37) 조리장도 마찬가지였다. 요리사에게 주방은 신성 불가침의 공간이다.

혹여 기자의 머리카락이 요리에 들어가기라도 할까 정색했다. 그는 커다란 프라이팬에 도라지를 잔뜩 볶아대고 있었다. 참기름을 휘휘 두르자 고소한 냄새가 났다. 오스트리아에서 도라지 나물이라니. 호텔 아침 뷔페에서 카망베르 치즈에 세 가지 종류의 햄을 호밀빵 바게트와 곁들여 먹어 속이 느글거리는 기자에게 이국에서의 도라지 나물은 생전 처음 보는 음식처럼 생경했다.

요리사가 축구대표팀과 동행한 건 2002년 한ㆍ일 월드컵 때부터다. 당시 한국은 유례없이 많은 경기를 치렀기 때문에, 영양공급을 담당하는 요리사의 역할에 눈을 뜨게 되었다. 월드컵에서는 식사도 전략이고 전술이다. 뭘 어떻게 먹을지도 정교하게 설계하고 결정한다.

예를 들어 한국 대표팀의 12일 식사 계획표를 현지 시간대로 검토해보자. 경기 전날인 11일 저녁 식사로 순한국식 메뉴인 청국장으로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한 선수들은 이 날 오전 9시에 아침식사를 하고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 경기에 출전했다. 아침 메뉴는 호텔에서 내놓은 빵ㆍ계란ㆍ소시지ㆍ콩ㆍ햄ㆍ치즈, 그리고 우유와 각종 주스였다. 경기가 오후 1시30분에 열리므로 점심은 경기를 마친 다음 숙소로 돌아가 오후 5시쯤 먹었다. 메뉴는 시금치된장국ㆍ새우ㆍ연어ㆍ콩나물무침ㆍ떡갈비 등이 올라갔다. 저녁 식사 시간은 오후 9시쯤으로 늦추었는데, 잔치국수 등 탄수화물 위주의 메뉴를 집중 배치했다. 경기를 치른 선수들의 몸에서 당이 빠져나갔기 때문에 충분히 보충해 둘 필요가 있어서다.

김 조리장이 처음부터 축구 대표팀 요리사였던 건 아니다.
전북기계공고를 졸업한 그는 한동안 밀링머신, 선반 같은 공작 기계를 다루며 쇠를 주물렀다. 적성에 맞지 않았다. 군대를 제대한 뒤 그는 요리사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주방에서 그릇 닦는 일부터 했다. 골프장의 그늘집에서도 경력을 쌓았다. 골프장 그늘집은 철마다 메뉴가 바뀐다. 그건 요리사에게 즐거우면서도 힘겨운 일이다. 김 조리장은 “다양한 요리를 만든 그때 경험이 축구대표팀 조리장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했다.

그는 3년 전부터 파주 대표팀 트레이닝센터에서 근무했다. 그에게 대표팀 조리장이 된 후 가장 보람 있는 순간을 물었다.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당연히 지금이죠.” 16강이란 단어는 그의 가슴도 뛰게 만든다.

대표팀 감독과 코칭스태프는 16강에 가면 포상금을 챙긴다. 감독은 3억원, 박지성 같은 특급 선수는 1억7000만원을 받을 수 있다. 설령 조별리그만 뛰고 돌아와도 감독은 1억 5000만원, A급 선수는 7000만원을 받는다. 그렇다면 조리장은? 애석하게도 공식적으로 나오는 보너스는 없다. 조리장만 그런 게 아니라 주치의, 장비 담당 등 대표팀 스태프가 모두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16강을 바라는 마음은 소박하고 단순하다. “내가 만든 음식을 먹고 뛴 선수들이 좋은 성적을 거두길 바라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요.” 인간은 하루에 세 끼를 먹는다. 시시포스의 비극적 숙명을 요리사처럼 절실하게 느끼는 사람이 또 있을까. 그의 노동은 고되다.

김 조리장이 묵고 있는 211호의 방은 대표팀 숙소에서 가장 먼저 불이 켜진다. 오전 5시에 일어나 준비를 한 뒤 주방 문을 여는 시간이 오전 5시30분이다. 선수단은 아침 식사를 오전 8시30분, 점심을 오후 2시, 저녁 식사를 오후 8시쯤 한다. 일을 마치고 주방을 정리하면 오후 9시30분이다. 그러고 잠자리에 들어 7시간쯤 잠을 자고 나면 어김없이 허기가 느껴진다. 그가 다시 일을 할 시간이 온 것이다.

주방은 전쟁터다. 여성들을 위한 공간이라는 건 가정집 주방을 두고 하는 말이다. 불과 뜨거운 기름과 칼이 춤을 추는 주방에는 군대만큼이나 엄격한 규율이 필요하다. 조리장은 명령하고, 조리사는 복종한다. 규칙은 조리장이 세우고 조리사는 그 규칙을 따른다. 그는 파주 트레이닝센터에서 신동일 조리사와 함께 일했다. 5명의 주방 보조 아주머니도 일손을 도왔다. 대표팀 출장은 늘 그 혼자 왔지만 이번 월드컵에는 신동일 조리사가 동행했다. 그래도 바쁘기는 마찬가지다.

주방 한쪽 구석에는 국거리로 쓸 것처럼 보이는 핏물을 뺀 소갈비가 그릇에 한가득 담겨 있다. 도라지를 볶고 있는 동안 가스레인지 위의 냄비에서는 무엇인가가 부글부글 끓고 있다. 싱크대의 채소, 나물, 버섯 등도 잘 다듬어져 있다. 파주 트레이닝센터에서 일할 때와는 달리 지금은 조리장도 두 손을 걷어붙여야 한다.

월드컵을 위해 이곳으로 이동하면서 그는 몇 가지 요리 기구를 파주에서 가져왔다. 밥통 2개와 대형 압력솥 2개, 휴대용 가스레인지 10개, 손에 익은 프라이팬 등등이다. 그는 “남아공 고지대에서는 밥이 설익기 쉽다. 그래서 압력솥을 가져왔다”고 설명했다. 휴대용 가스레인지는 선수들에게 전골 요리를 낼 때 사용된다. 식자재는 오스트리아에 도착하자마자 프랑크푸르트의 대형 한국 식재료 상점에 가서 주문했다. 한식도 이젠 많이 세계화된 덕분에 어지간한 곳에서는 식재료를 구할 수 있다. 오스트리아 노이슈티프트에 임시 한식당이 생겼다고 생각하면 딱 맞다.

메뉴는 매일 바뀌지만 메인 요리 3~4가지에 밑반찬 3~4개, 김치 2개와 전골이 기본적으로 제공된다. 메뉴도 매번 바뀐다.

순대국밥전골, 가오리찜, 삼겹두루치기, 굴전, 아보카도샐러드, 굴비채무침, 콩조림, 돌자반볶음, 김치(이상 6월 1일 저녁), 해물어묵전골, 치킨단각구이, 임연수구이, 낙지볶음, 사태계란장조림, 치즈샐러드, 김치, 낫토, 북어채무침(이상 6월 2일 점심), 감자탕전골, 양사태조림, 농어구이, 관자샐러드, 삼겹김치볶음, 닭다리구이, 김치, 낫토, 연근 조림(이상 6월 2일 저녁) 등이 대표선수들이 먹은 실제 메뉴다. 며칠 전에는 베트남 쌀국수도 메뉴에 올랐다. 외국에서 한국으로 연수 온 축구코치는 “어떻게 매일같이 메뉴가 바뀔 수 있느냐”며 깜짝 놀랐다. 김 조리장은 곤드레밥 등 새로운 메뉴가 나오면 TV와 인터넷을 뒤지고 자료를 찾아 만들어내는 노력파다.


예전 축구선수 중에는 입이 짧은 선수가 꽤 많았다. 외국에만 나가면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몰래 라면을 끓여 먹는 선수가 적지 않았다. 맵고 짠 라면만 먹어서는 힘을 낼 수가 없기 때문에 몇몇 감독은 불시에 짐 검사를 해서 라면을 수거하기도 했다. 아마 지금처럼 음식이 지원됐다면 한국 월드컵의 역사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맛있는 게 많으니, 이운재가 살이 찔 법도 하다”고 말하자 김 조리장이 손사래를 쳤다. 그는 “이운재 선수는 체중 관리를 위해 절대로 많이 먹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파주 트레이닝센터에는 A대표와 청소년 대표가 모두 들어온다. 성장기에 있는 청소년 선수들이 먹는 양이 제일 많고, 대표선수들은 모두 자기 절제를 잘하는 편이다. 특히 박지성 선수는 자기가 먹을 만큼 정확히 음식을 담고 남기는 법도 거의 없다. 절제를 잘하는 선수들이 축구도 잘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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