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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힐 뒷굽 안 끼게 보도블록 틈새 2㎜로 좁혔어요”

중앙선데이 2010.06.13 00:22 170호 14면 지면보기
‘여행 프로젝트’ 중 콜택시 호출, 어린이집 위치 정보 등 4개 서비스가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으로 개발돼 보급되고 있다. 조은희 정책관은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직접 택시 호출을 시연해 보였다. 신동연 기자
여성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경험했을 일이다. 공원·영화관·백화점에 가면 유독 여자 화장실 앞에만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멀쩡히 길을 걷다 하이힐 뒷굽이 보도 블록 사이에 끼어 민망해지는 일 말이다. 작은 불편도 쌓이면 큰 불만이 된다. 잊고 지나칠 법한 작은 문제에 착안해 바로잡은 사람이 있다. 조은희(49) 서울시 여성가족정책관이다.

유엔 공공행정대상 받는 ‘女幸 프로젝트’ 주역 조은희 서울시 정책관

서울시가 간판사업으로 내세우고 있는 ‘여행(女幸) 프로젝트’를 주도한 주인공이다. ‘여행’은 ‘여성이 행복해지는 도시’의 줄임말. 5개 분야(돌보는 서울, 일 있는 서울, 넉넉한 서울, 안전한 서울, 편리한 서울) 90개 생활밀착형 사업으로 구성돼 있다. 그러나 사업 어디에도 평등이나 극복 같은 거창한 말이 없다. 대신 대수롭지 않게 여길 법하지만 실생활에서 여성에게 가장 필요한 내용이 담겼다. 변기 개수를 늘려 여자 화장실 앞에만 늘어선 줄을 줄이고, 보도 블록의 틈새를 2㎜ 이하로 좁혀 하이힐 굽이 끼지 않도록 하고, 주차장의 조명을 더 밝혀 여성 운전자가 안심하게 만드는 것 등이다.

‘여행 프로젝트’가 올해 유엔 공공행정상(UNPSA:Public Service Awards) 대상을 받는다. 2003년 제정된 이 상은 매년 전 세계 공공기관의 행정 서비스와 정책 중 우수한 사례를 선정해 시상한다. 조 정책관은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리는 시상식(23일)에 참석하기 위해 19일 출국한다. 출국에 앞서 9일 조 정책관을 만났다.

서울시 여성 공무원 중 최고위직인 그는 다양한 이력을 가졌다. 신문기자로 사회 생활을 시작했고 김대중(DJ) 정부에서 청와대 비서관을 지냈다. ‘우먼타임스’ 편집국장, 한양대 겸임교수, 양성평등실현연합 공동대표, 이명박 대통령 인수위원도 거쳤다. 그는 “만들고 싶어 만든 게 아니라 살아남으려다 보니 생긴 이력”이라고 했다.

그가 여기에 서울시 정책관 이력을 더한 건 2008년 5월. 6개월이나 공석인 자리였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그에게 첫마디로 “여행 프로젝트를 살려 달라”고 했다. 각 실국이 함께하는 프로젝트인 만큼 “말 안 듣는 데가 있으면 얘기하라”고도 했다. 오 시장이 2007년 초 직접 제안하고 이름 붙인 프로젝트가 제자리걸음인 게 안타까웠던 거다.

“제가 그랬죠. ‘그럼, 시장님께 고해 바치는 게 되는데 저 왕따 됩니다’. 더군다나 외부에서 왔는데….”

처음 100일은 팍팍했다. 복잡한 서울시정을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한 달 만의 첫 보고회에서 자신감을 완전히 잃었다. “어깨에 힘이 쫙 빠지면서 도망가고 싶었다”고 했다. 터닝포인트는 딱 취임 100일째 되는 날이었다. “사무실에 들어왔더니 시커먼 양복들이 모여 있는 거예요. 국장·과장·팀장 50명이 케이크·샴페인 들고 축하한다고 왔어요. 눈물이 핑 돌더라고요. 이젠 진짜 서울시 식구가 됐구나. 여기서 승부를 보겠다고 생각했죠.”

‘여행 프로젝트가’가 추진력을 얻고 달리기 시작했다. 각 분야의 전문가 300명이 모인 ‘여행 동반자’와 자치구별 전문가 집단인 ‘여행 포럼’이 구체적인 아이디어를 쏟아 냈다. 주부·직장인·여대생 등 일반 시민은 ‘여행 프로슈머’로 참여해 현장을 모니터링했다.

여행 화장실, 여행 길, 여행 주차장 외에 콜택시, 서울형 어린이집, 엄마가 신났다, 초등학교 급식 도우미, 여행 공원, 여행 아파트를 9대 대표 사업으로 만들었다.
화장실 개선을 위해선 서울 시내 화장실을 전수 조사했다. 여성은 남성보다 화장실에 머무는 시간이 2.5배 길다. 하지만 공공화장실의 여성 변기 개수는 1대 0.6의 비율로 남자보다 훨씬 적었다. 변기 수를 늘리고 아이와 함께 온 엄마를 위한 기저귀 교환대 등을 설치했다.

보육·교육·일자리 정책에서도 성과를 냈다. 그중 가장 큰 호응을 얻은 것이 서울형 어린이집이다. 서울의 어린이집은 5600곳이다. 하지만 싸면서 안심하고 아이를 맡길 수 있는 국공립은 620곳뿐. 이렇다 보니 태아의 임시 주민번호를 받아 어린이집에 대기 신청을 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대기자가 7만8000명이나 됐다. 조 정책관은 생각을 바꿨다.

“국공립을 하나 짓는 데 28억원이 들어요. 그래서 발상의 전환을 했죠. 민간을 국공립만큼 업그레이드하는 거예요. 서울시가 정한 조건을 만족하면 인증하고 보육료, 교사 월급을 시가 지원해요. 국공립처럼 보육료는 내리고 교사 월급은 오르고 보육 서비스는 좋아진 거예요. 지금까지 민간 어린이집의 46%가 인증을 받았고 국공립 대기자가 2만8000명으로 줄었습니다.”

‘엄마가 신났다’는 여성의 일자리 찾기를 돕는 프로젝트다. 특히 교사·간호사 등의 자격증을 갖고 있지만 ‘장롱 면허’여서 재취업에 어려움을 겪는 여성을 위한 서비스다. 조 정책관은 “절실했던 내 경험이 녹아 있는 정책”이라고 했다. 그는 “일하고 싶어 아이를 하나(아들)밖에 안 낳았다”고 한다. 하지만 일하는 엄마에게 아이 하나 양육도 벅찼다. 기자로 현장을 뛰던 시절, 매일 아침 엄마에게 “일찍 와?”라고 묻던 아들은 혼자 살길을 찾아 인터넷 중독에 빠졌다.

“그때 ‘바람의 나라’라는 온라인 게임이 인기였는데 전국에서 랭킹 3위였대요. 문 걸어 잠그고 햄버거·콜라 먹으면서 게임만 하니까 체중이 100㎏까지 나가고…. 어느 날 안 되겠다 싶어 회사를 그만뒀어요.”

시사여성주간지 ‘우먼타임스’ 편집국장을 할 때였다. 4~5년 쉬면서 “죽자 사자 애하고 붙었다”. 다행히 아들은 자리를 잡았지만 이번엔 조 정책관의 재취업이 문제가 됐다.

“막막하더라고요. 누구한테 어디 가서 얘기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기자라고 똘똘하다고, 청와대 비서관까지 했던 여자가 그랬으니 말이에요. ‘엄마가 신났다’ 이런 건 남 얘기가 아니에요.”

여행 프로젝트가 유엔의 평가를 받은 건 여성의 관점으로, 실질적으로 여성의 요구를 도시 정책에 반영했다는 점이다. 지난달 초 유엔 공공행정상 대상 선정 결정에 앞서 3월엔 유엔-해비타트(HABITAT)와 여성친화도시 조성을 위한 양해각서(MOU)도 체결했다. 서울의 경험을 전 세계가 공유할 수 있도록 정책 개발에 협력하자는 취지다.
조 정책관은 민선 5기 ‘여행 프로젝트’의 그림을 그리고 있다.

“특히 여성의 안전과 건강에 중점을 두려 해요. 서울시가 인증하는 여행 안전 마을을 자치구마다 시범으로 지정할 생각인데 여성이 안전하다는 건 노약자가 다 안전하다는 얘기잖아요. 앞으로 도시계획을 할 땐 ‘이렇게 하라’는 모델이 되는 거죠. 성매매 여성 등 사각지대에 있는 여성을 위한 정책에도 역량을 집중시킬 생각이고요. 여성 건강과 관련된 모든 서비스를 모은 ‘여성건강증진타운’을 노원구 창동에 완공할 계획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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