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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병들게 하는 세습

중앙선데이 2010.06.13 00:17 170호 15면 지면보기
어버이의 자식 사랑은 하해(河海)와 같다고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자식사랑은 일종의 이기심에 속한다. 내 유전자를 지닌 자녀에 대한 사랑은 인간이면 누구나 갖고 있는 자기애적 경향의 연장이다. 인간에게 자기와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어떨까. 살아갈 의욕도, 일할 의욕도 잃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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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랑도 맹목적이거나 지나치면 독이 된다. 특히 자녀에게 무턱대고 재산과 명예까지 물려주는 경우 적지 않은 후유증이 생기기도 한다. 부모 재산으로 살면 된다는 생각에 영원히 캥거루새끼 노릇을 하려는 자녀가 생길 수 있다. 분석심리학에선 이를 ‘영원한 아이 증후군(Eternal child syndrome)’이라고 부른다. 힘든 것은 하지 않으려 한다. 돈이 나올 곳이 있으니 일을 하지 않게 되고 무력해지는 것이다. 어차피 줄 돈인데, 왜 미리 주지 않느냐며 행패를 부리는 자녀도 나온다. 재산 분쟁으로 부모 자식 간에 서로 고소하고, 상해를 입히고 심지어 살인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 어려서부터 ‘결핍’과 ‘극기’를 가르치는 게 필요한 이유다. 이런 가치를 배우지 못하면 땀 흘려 일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보람과 즐거움을 알지 못할 것이다. 자녀들이 이렇게 되는 데는 부모의 책임도 있다. 돈만 물려주었을 뿐, 세상을 살아가는 법과 사랑하는 법, 윤리적 태도를 가르치지 않아 생기는 현상이다.

부와 명예가 배타적으로 세습되는 사회는 젊은이들을 전반적으로 무력하고 우울하게 만든다. 어차피 노력해 봤자 좋은 부모 만난 아이들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다는 절망감으로 일할 의욕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부의 세습이 심하고 계층간 이동이 봉쇄된 나라의 주관적 행복도와 성장동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핵심계층·동요계층·적대계층으로 나뉘어 어디에 속하느냐에 따라 그 운명이 결정되는 북한, 빈부 차이가 세습되는 필리핀·중남미가 발전하지 못하는 이유다.

일부에서는 한국을 가족주의의 폐해가 심한 나라가 아니냐는 얘기를 한다. 가문을 중시하는 유교적 전통이 유지되는 상태에서 합리적인 근대성(Modernity)이 자리 잡지 못한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미국과 유럽의 기업 가운데 가족통제 기업의 비율이 80% 안팎이라고 한다. 그런데 부모가 자식에게 기업을 포함한 재산을 상속하는 비율은 낮다. 그것은 부모가 꼭 현명해서가 아니다. 상속세율이 워낙 높기도 하고, 노후에 자녀에게 기대 살겠다는 생각을 하는 부모가 적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자녀가 늙은 나를 거두겠지’ 하고 은근히 바라는 우리나라의 일부 부모 모습과는 대비된다.

최근 북한에서는 김정일이 자식에게 권력을 물려주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모두가 평등하자’는 마르크시즘을 실현한다면서 봉건주의식 권력 세습을 자행하는 블랙코미디가 연출되고 있다. 핵심 지배층의 이해관계와 아무도 믿지 못하는 독재자의 피해의식이 만들어낸 부작용이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죄 없는 북한 주민들의 몫이 된다. 흉보며 닮는다고, 그런 북한만 걱정할 게 아니다. 계층의 고착화가 가속화되는 우리 형편을 걱정해야 될 부분은 없는지 돌아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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