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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D-10] 최미나·허정무의 월드컵 일기 ③

중앙일보 2010.06.01 01:15 종합 28면 지면보기
청심환을 먹고 잤는데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오늘은 온 몸에 열꽃이 올라 병원에 가서 링거 주사를 맞고 왔다. 어제(5월 30일) 벨라루스 전에서 0-1로 진 뒤 남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한 번도 웃지 않다가 마지막 방송 인터뷰를 할 때 딱 한 번 웃는 표정을 지었다.


A매치 땐 피가 마르고 온몸에 열꽃 … 이젠 휴대전화 끄고 기도할래요

언젠가 지는 날이 한 번은 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패배가 닥치니 눈앞이 캄캄했다. ‘평가전’은 공부하라고 주어진 기회라고 한다. 그래도 ‘왜 약체 벨라루스 전에서 공부를 하나. 세계 1, 2위를 다투는 스페인 전에서 공부하는 게 타격이 덜할 텐데’ 하는 생각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남편도 막상 닥친 패배가 뼈아팠는지 경기 끝나고 어제, 오늘 전화를 걸어오지 않았다.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모양이다.



문득 2008년 6월 북한 전 0-0 무승부와, 올해 2월 중국 전 0-3 패배의 기억이 살아났다. 두 경기 후에 남편을 경질해야 한다는 말들이 나왔다. 그땐 정말 무서웠다. 남편이 성적 부진으로 지휘봉을 놓은 적이 있던 터라 또 비슷한 일이 반복되는 것 아닌가 하고 걱정을 많이 했다. 그때도 온 몸에 열꽃이 올랐다. 당시 동네 목욕탕에서 탤런트 김수미 언니를 만났는데, 언니가 “어머, 너 몸이 왜 이러니. 울긋불긋 난리가 났네” 하며 화들짝 놀랐다. 곁에 있던 목욕관리사 언니가 “최 여사는 대표팀 경기만 있으면 열꽃이 올라. 신경쓰지 마요”라고 거들었다. 그제야 김수미 언니가 “왜 그러고 사니” 하면서 혀를 끌끌 찼다.



남편은 스트레스를 잘 내색하지 않는 성격이다. 그런데 그 당시엔 자꾸 가슴을 눌러댔다. 나도 소화가 잘 안 돼 함께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더니 남편은 ‘역류성 식도염’, 나는 ‘위장병’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둘이 마주보고 “한 명만 앓아도 되는데 둘이 다 아프고 난리냐”면서 피식 웃었던 기억이 난다. 남편이 축구선수일 때는 사실 팀이 경기에 져도 내 남편이 골을 넣으면 내심 기뻤는데, 남편이 감독이 되고 보니 한 경기 한 경기 피가 마른다. 경기에 지면 온 집이 쥐 죽은 듯 고요하다. 그야말로 ‘이기면 천당, 지면 지옥’이다. 어제 경기가 끝난 뒤에는 정해성 코치 부인이 전화를 했다. “저것도 전술일까요? 시험하느라 그런 거겠죠? 진짜 최고 실력을 다 보인 건 아니잖아요. 가슴이 떨려서 죽겠어요” 한다. 이럴 때 의지할 수 있는 건 우리끼리뿐이다. 그 누구도 우리 심정은 알기 힘들 것이다.



어제 경기에서는 곽태휘(교토) 선수가 다친 것도 너무 가슴이 아프다. 그의 표정이 잊혀지지 않는다. 경기 전 애국가가 울려퍼질 때 어쩐지 계속해서 곽태휘 선수의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손을 쫙 펴지 않고 주먹을 쥔 듯 오므려 가슴에 댄 걸 보면서 ‘아, 저 선수 각오가 대단하구나’ 했는데, 열심히 뛰던 전반 30분쯤 상대 선수와 부딪치더니 일어나지 못했다. 곽태휘 선수 부인 강수연씨의 얼굴이 떠올랐다.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미어졌다.



곽태휘 선수는 남편과 특별하다면 특별한 인연이 있는 선수다. FC서울에서 뛰다가 남편이 이끌던 전남으로 이적해 왔는데, 당시 그가 매우 속상해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서울에서 뛰다가 시골 팀으로 오는 선수들은 거의 다 서운한 감정을 느낀다. 그래서 전남팀의 연말 부부 모임에서 곽태휘 선수 부부에게 더 열심히 말도 걸고, 잘 해주려고 애쓰곤 했다.



다행히 전남에서 기량을 꽃피우고 국가대표에 발탁되면서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남편과 함께 전남-국가대표 운명을 함께한 것 같아서 묘한 동지의식 같은 것도 느꼈다.



허정무가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이탈리아전에서 슛을 날리고 있다. 한국은 허정무와 최순호가 골을 넣었지만 2-3으로 졌다. [중앙포토]
내 남편도 선수 시절 비슷한 일이 있었다. 1986년도 멕시코 월드컵 때였다. 그때 남편은 무릎 부상 중이었고, “벤치 지킬 사람을 데려갈 필요는 없다. 뛸 수 있는 선수를 데리고 가라”며 자진해서 월드컵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당시 대표팀 김정남 감독은 “그래도 선수들한테 힘이 돼줄 수 있는 선수이니 같이 가자”고 남편을 설득했고, 남편은 결국 대표팀에 합류했다. 나는 김포공항에서 출국하는 남편을 보며 기둥 뒤에서 목놓아 울었다. 뛰지도 못할 월드컵에 가는 남편이 애처로워서다. 그날부터 “남편이 1분이라도 월드컵에서 뛰게 해달라”고 매일같이 교회에 가 기도했다. 정말 신기하게도, 남편은 결국 이탈리아 전 후반에 나와 기적처럼 한 골을 넣었다. 내 남편의 선수 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다. 곽태휘 선수가 제발 남편처럼 오뚝 일어서주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또 이번 월드컵 때 뛸 수 없다 하더라도 인생의 더 큰 무대를 위해 마음을 다잡아줬으면 좋겠다.



오늘부터 월드컵 때까지 나는 휴대전화를 잠시 꺼두고 하루 종일 기도에 매달리려고 한다. 새벽부터 밤까지 선수들과 남편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면 또 한 번의 기적이 일어날 것만 같다. 액땜은 벨라루스 전에서 다 했다고 믿는다. 진짜 게임은 이제부터다.



정리=온누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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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이름 소속기관 생년
김수미
(金守美)
[現] 탤런트 1951년
허정무
(許丁茂)
[現] 대한민국축구국가대표팀 감독
1955년
최미나
(崔美那)
[現] 윌러스 대표
1954년
곽태휘 [現] 일본교토상가FC 축구선수(수비수(DF))
198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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