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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오늘] 연합군 노르망디 상륙 개시 … ‘지상 최대의 작전’ 펼쳐지다

중앙일보 2010.06.01 01:07 종합 33면 지면보기
1944년 6월 5일, 아이젠하워(왼쪽)가 노르망디 강하를 앞둔 공수부대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 작전에서 함선 1200척, 항공기 1만 대, 상륙주정 4126척, 수송선 804척과 수백 대의 수륙양용 특수장갑차로 편성된 대부대가 15만6000명의 병력(미군 7만3000명, 영국-캐나다 합동군 8만3000명)을 노르망디에 상륙시켰다. 그중 13만2500명은 배로 영국해협을 건넜고 2만3500명은 공중 수송되었다.
1944년 5월 말, 주말마다 런던 도심을 떠들썩하게 하던 미국·영국·캐나다 병사들의 모습이 썰물처럼 사라졌다. 유럽 대륙에 대한 공격이 임박한 것이다. 1944년 6월 6일의 오버로드(Overlord) 작전, 즉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D데이는 애초에는 6월 5일이었다. 하지만 당일 영국해협의 날씨는 25년 만에 최악의 상태였다. 연합군 최고사령관 아이젠하워는 고민했다. 하지만 6월 6일 아침에 잠시 하늘이 맑아질 거라는 일기예보를 믿고 그날을 D데이로 정하고 공격명령을 내렸다. 작전이 성공한다면 동부전선의 소련군과 더불어 독일을 샌드위치 신세로 만들 수 있었다.



사상 최대 규모의 함대가 노르망디 해안을 5곳으로 나눠 상륙을 시작했다. 미군은 서쪽의 ‘유타’ ‘오마하’ 해변에, 영국-캐나다군은 ‘골드’ ‘주노’ ‘소드’ 해변에 상륙했다. 연합군의 전황은 명암이 극명하게 엇갈렸다. 영국-캐나다군은 3개 해변에 성공적으로 상륙을 마쳤다. 미군은 ‘유타’에서는 12명만이 목숨을 잃고 신속하게 교두보를 확보했지만, ‘오마하’에서는 독일군의 무자비한 포화 속에 1100명이 목숨을 잃는 큰 피해를 당했다. 6월 6일 하루에 숨진 연합군 병력이 모두 2500명이었으니 오마하 전투가 얼마나 격렬했는지 알 수 있다. 결국 미군은 압도적인 수적 우세와 끈질긴 공격, 일부 병사의 영웅적 행동과 해군함정의 함포 지원으로 독일군을 제압하고 해안선에 거점을 확보했다.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한 보병이 그날 프랑스 땅을 밟은 최초의 연합군은 아니었다. 상륙작전이 시작되기 전 이른 아침의 어둠 속에 2개의 미군 공수사단과 1개의 영국군 공수사단이 적 후방을 교란하기 위해 노르망디 해안 뒤쪽의 내륙에 강하했다. 미군 공수부대는 공수작전의 어려움이란 어려움은 다 겪었다. 공수부대원을 태운 항공기 조종사들은 경험 부족으로 강하지점을 놓치기 일쑤였고, 고사포를 무서워하는 바람에 병사들을 마구잡이로 강하시켰다. 많은 병사가 목표지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강하하면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하지만 이렇게 넓은 범위에 공수부대원들이 분산됨으로써 독일군이 정확한 상륙 지점을 파악할 수 없게 만드는 ‘뜻밖의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미군 공수부대원들은 넓은 지역에 분산된 상황에서도 독일군의 통신선을 절단하고 후방 지역에 혼란을 일으킴으로써 상륙 당일 독일군이 유타 해변에서 대규모 반격에 나서는 것을 성공적으로 저지했고, 미군이 유타 해변에 확고한 발판을 마련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실수도 좋은 결과를 맺는 국운(國運)이 ‘대한민국호’의 앞날에도 펼쳐졌으면.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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