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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복의 세상읽기] 위기의 서해를 평화의 서해로

중앙일보 2010.06.01 01:06 종합 33면 지면보기
지금 북한은 결정적인 물증이 나왔는데도 계속 범행을 부인하는 범죄자의 모습이다. 피해자 주변에서 피 묻은 칼이 발견됐고, 그 칼에서 범인의 지문이 나왔다. 피해자의 몸에 난 상처와 칼날의 모양이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으로 판명됐고, 칼에 묻은 피와 피해자의 혈액형도 동일한 것으로 밝혀졌다. 북한이 빠져나갈 구멍은 거의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북한은 천안함 폭침(爆沈)은 조작된 증거를 토대로 날조된 사건이라며 발뺌하고 있다. 북한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증거 조작을 입증해야 한다. 남한이 확보한 어뢰의 추진체가 북한제가 아니거나 천안함 침몰과 무관한 어뢰의 추진체라는 점을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 증명해야 한다. 남한이 입수한 북한제 어뢰의 설계도가 실제와 다르다는 점도 납득시켜야 한다. 둘째, 알리바이 증명이다. 천안함이 침몰한 3월 26일 오후 9시20분을 전후한 시각에 북한이 보유한 그 어떤 잠수함이나 잠수정도 사고 현장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면 북한은 혐의에서 벗어날 수 있다.



두 가지 조건 중 하나라도 만족시킨다면 상황은 완전히 역전된다. 북한은 모함에 시달린 억울한 피해자가 되고, 남한 정부와 군(軍)은 희대의 사기꾼이 된다. 이명박 정부의 도덕성과 권위가 땅에 떨어지면서 정권 유지 자체가 힘들어진다. 조사에 참여한 나라들도 치명상을 입게 된다. 일거에 전세를 반전시킬 수 있으니 이 얼마나 매력적인 카드인가. 북한이 정말로 결백하다면 말로만 아니라고 할 게 아니라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 확보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지난 주말 북한 국방위원회 소속 장교들이 평양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남측 조사 결과를 반박했지만 앞서 언급한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어떤 증거도 제시하지 않았다. 그런 신출귀몰한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자신들에게는 없으며, 그 어뢰는 북한이 만든 게 아니라는 주장이 사실상 전부였다.



[일러스트=강일구]
북한의 맞불작전도 혐의를 키우고 있다. 북한은 남한 정부가 밝힌 대응조치에 일일이 맞대응하고 나섬으로써 한반도의 긴장 수위를 끌어올리고 있다. 자신들의 소행이 아니라는 점만 입증하면 한 방에 한국은 물론이고 한국 편을 드는 미국과 일본까지 ‘케이오(KO)’시킬 수 있는데도 그런 노력은 보이지 않고, 10만 군중대회나 열고 있다. 그러니 도둑 제발 저린 꼴 아니냐는 소리가 나온다.



증거 앞에서 거짓은 무너지게 돼 있다. 시간 문제일 뿐 결국은 범행을 시인하고, 자백할 수밖에 없다. 당장은 중국이 ‘악마의 변호사(devil’s advocate)’ 노릇을 하고 있지만 북한이 반증(反證)하지 못하는 한 중국도 계속 북한 편을 들긴 어렵다.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판단해 시시비비를 가릴 것”이며 “그 결과에 따라 누구도 비호하지 않을 것”이라는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의 말은 결백을 입증하든지, 범행을 인정하든지 양자택일하라는 주문으로 읽힌다.



북한은 무조건 버티면 결국은 시간이 해결해줄 것으로 믿고 싶은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로서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그냥 넘어갈 수 없게 돼 있다. 그러기에는 이미 너무 많이 나갔다. 칼을 뺀 이상 무라도 잘라야 할 판이다. 국민 다수도 이에 동조하고 있다. 마주 보고 달리면 충돌은 불가피하다. 잘못한 쪽에서 먼저 멈추는 수밖에 없다. 북한은 심각하게 출구를 고민해야 한다. 긴장 상태가 지속되는 것은 남북한 모두에 좋은 일이 아니다. 8000만 민족의 고통을 대가로 미국·중국 등 강대국 좋은 일만 시켜주는 꼴이다. 남한 정부도 북한이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할 수 있도록 퇴로를 열어줄 필요가 있다.



조사 결과가 나온 후 발표한 대국민 담화에서 이 대통령은 천안함 침몰을 북한의 무력 도발로 규정하면서도 책임의 주체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지목하진 않았다. 그럴 수도 있었지만 결국은 이를 피함으로써 그에게 빠져나갈 구멍을 열어줬다. 현명한 선택이라고 본다. 쥐를 잡더라도 빠져나갈 구멍은 주고 몰아야 한다.



물론 김 위원장으로선 쉽지 않을 것이다. 그가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에게 직접 결백을 주장했다는 언론보도가 사실이라면 스스로 말을 뒤집어야 한다. 절대 권력자가 부하들에게 속았다고 자백한다는 것이 간단한 문제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다른 길이 없어 보인다. 일본인 납치를 시인할 때 했던 것처럼 화끈하게 시인하고, 사과해야 한다. 보고를 제대로 못 받은 자신의 책임도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그걸로 끝나서는 안 된다. 김 위원장이 시인과 사과로 첫 단추를 끼워주면 남북이 서해의 긴장 완화 방안을 놓고 머리를 맞대야 한다. 서해의 군사적 대치 상태를 해소함으로써 다시는 천안함 사태와 같은 비극이 재발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미 남북간에는 서해 공동어로 및 평화수역 설정을 통해 북방한계선(NLL) 문제를 해결한다는 취지의 ‘10·4 공동선언’이 있다. 이명박 정부 들어 사문화됐지만 이를 협상의 토대를 삼는 것도 방법일 수 있다.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를 진심으로 원한다면 미국과 중국도 이 방향으로 협상을 중재하고 유도해야 한다. 천안함 사태를 계기로 위기의 바다 서해를 평화의 바다로 바꾸는 것이야말로 46명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는 최선의 길이다. 위기를 기회로 바꾼 지도자로 이 대통령이 역사에 남는 길이기도 하다.



글=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일러스트=강일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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