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김환영의 시시각각] 유권자의 지혜

중앙일보 2010.06.01 01:04 종합 34면 지면보기
지혜만큼 인류가 소중하게 여겨 온 능력은 없다. 지혜는 대승불교에서 육바라밀(六波羅蜜), 즉 여섯 가지 수행덕목 중 하나다. 불교에서 지혜는 미혹을 소멸하고 궁극적 이상인 보리(菩提)를 성취하게 하는 힘이다. 가톨릭·성공회·루터교 등 상당수 그리스도교 교파에 따르면 지혜는 성령이 주는 7가지 선물 중 하나다.



세속의 관점에서도 지혜는 힘의 원천이자 힘 그 자체다. 지혜는 사물의 이치를 깊이 이해해 올바른 선택을 하는 능력이다. 지혜를 지닌 개인이나 집단은 융성했다. 기원전 10세기 이스라엘의 현왕(賢王) 솔로몬은 광개토대왕과 세종대왕을 합친 듯한 제왕이었다. 그는 대제국을 건설했으며 지혜문학을 꽃피웠다. 솔로몬은 지금도 현인(賢人)과 동의어다.



지혜와 집단이 만났을 때에도 막강한 힘이 분출된다.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를 대표적 사례로 꼽는다. 아테네는 1000여 개 다른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압도하며 민주주의가 우월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비결이 무엇이었을까. 스탠퍼드대 석좌교수인 조시아 오버에 따르면 한 달에 두 번 모여 국사를 논한 8000여 명의 아테네 시민이 올바른 선택을 한 게 아테네 파워의 원천이었다.



‘위대한 지도자’를 정점으로 하는 독재나 전체주의가 아니라 국민 모두가 정치를 이끄는 민주주의가 더 강한 이유는 무엇일까. 르포·비평 잡지인 뉴요커에 경제 칼럼을 기고하는 제임스 수로워키라는 언론인이 쓴 『대중의 지혜(The Wisdom of Crowds)』(2004년)라는 책에서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다. 수로워키는 재미 있는 일화로 책을 시작한다. 프랜시스 골턴(1822~1911)이라는 영국의 탐험가·인류학자·우생학자는 지능이 높은 소수만이 사회를 운영할 수 있다고 생각한 엘리트주의자였다. 그러나 골턴은 어느 날 시골 장터에서 자신의 믿음을 깨지게 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도살한 황소의 무게를 알아맞히는 내기가 있었는데 정답자는 없었지만 내기에 참가한 사람들이 적어낸 숫자의 평균을 내보니 정답인 1197파운드에서 1파운드 모자라는 1196파운드였다.



수로워키가 내린 결론은 “개개인 선택의 총합은 탁월한 전문가들의 선택보다 우월하다”는 것이다. 기원전 4세기 사람인 아리스토텔레스도 일찍이 이렇게 말했다. “일반인 개개인은 전문가들보다 판단력이 떨어지지만 일반인들이 함께 작업하면 전문가들보다 더 우수하거나 적어도 못하지는 않다.”



내일은 지방선거가 있는 날이다. 약 3500만 명에 이르는 유권자들이 1인 8표를 행사해 ‘우리 동네를 이끌어갈 일꾼’ ‘우리나라 지방자치를 책임질 8개의 공직’을 선택하는 날이다. 유권자 개개인은 정치 전문가보다 못할 수 있다. 그러나 ‘민심은 천심’이라는 말처럼 유권자 선택의 총합에서 도출되는 민심은 항상 옳아야 한다. 그럼에도 선거 후에 후회하는 유권자들이 그렇게 많은 이유는 또 무엇일까. 지혜로운 선택이 아니라 어리석은 선택을 했기 때문이 아닐까.



수로워키는 『대중의 지혜』에서 대중이 똑똑하려면 몇 가지 전제조건이 있다고 했다. 첫째, 의견이 다양해야 한다. 아무리 사소하거나 이상한 의견이라도 개개인에게 전달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선택이 독립적이어야 한다. 개개인의 의견은 주변 사람들의 의견에 의해 결정되지 말아야 한다. 셋째, 선택이 분산돼야 한다. 개개인은 현지의 정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리 선거 문화에서 첫 번째 전제조건은 어느 정도 충족되고 있다. 문제는 두 번째, 세 번째 전제조건이다. 지역구도가 맹위를 떨치는 선거 패턴이 유지되다 보니 주변의 의견이 결정적이다. 또한 내가 사는 곳의 현지 정보, 현지 상황보다는 중앙의 정치 상황이 투표행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유권자(有權者)는 글자 그대로 ‘대표를 선출할 권력을 가진 사람’이다. 고대 히브리인은 “권위는 지혜의 힘으로부터 탄생한다”고 봤다. 유권자들이 선거 후에도 만족하기 위해서는 우선 지혜롭게 표를 찍어야 한다.



김환영 중앙SUNDAY 지식팀장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