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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칼럼] 이장님의 현수막

중앙일보 2010.06.01 00:58 종합 35면 지면보기
4년마다 돌아오는 지방자치선거는 유권자들에겐 곤욕이다. 국가의 장래가 달린 선거를 이렇게 얘기하면 욕먹기 십상인데, 천안함 사태로 한껏 울적하고 불안해진 심사에 목 좋은 곳마다 나붙은 현수막이 읽힐 리 없고 후보들이 외치는 엇비슷한 정책들을 조약돌 줍듯 공들여 가려낼 기분도 아닌데 어떡하랴. 선거를 하루 앞둔 오늘 즈음이면, 아무리 시간에 허덕이는 사람이라도 시장·도지사·교육감 정도는 대강 점지해 두었겠지만, 연필통 속에 나란히 도열한 색연필처럼 고만고만한 무슨 의원, 무슨 의원 하는 인물들에 대해선 아예 판단하기를 포기한 사람이 많을 것이다. 정치 발전엔 기초의원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개론인데, 마음껏 주어진 이 결재의 자유는 왜 이리 번거로운가.



며칠 전 선거관리위원회가 발송한 두툼한 홍보물이 도착했다. 족히 반 시간가량은 걸릴 것 같은 두께의 중압감과 그래도 일별하라는 시민적 사명감 사이에서 잠시 주저하다가 봉투를 개봉했다. 일별의 결과는 혼란이었다. 두 번째 판독에서 약간 갈피가 잡혔다. 도장을 여덟 번 눌러야 한다는 것. 여기까지는 인내심이 버텨주었는데 인물 탐색으로 진입하자 가까스로 잡힌 갈피가 다시 허물어졌다. 인물과 이름은 다른데 공약은 비슷했고, 단체장과 기초의원 간에도 유사한 메뉴들이 자주 등장했다. 거리를 누비고 있는 총 27명 중 8명을 가려내는 작업은 쉽지 않아 보였다. 시의원 15명, 구의원 40명, 교육의원 4명이 경합하는 옆 동네, 서울에서 고령자가 많기로 소문난 옆 동네엔 비상한 기억력과 결단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도 뭔가 바람이 불어준다면 착 가라앉은 유권자들의 마음이 촉발될 수도 있을 터인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올 선거에는 바람도 없다. 아니 거대한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엔 미풍도 없듯, 야당 지도부와 후보들이 아무리 풀무질을 해봐야 제풀에 사그라지는 게 이번 선거의 특징이다. 천안함 삭풍이 표심을 얼어붙게 만든 탓이다. 북한도 남한 쌍끌이 어선의 실력에 적이 당황했을 것이다. 뻘밭에 처박혔을 어뢰 발진체가 구식 통통선에 끌려나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을 터에 이게 웬일인가 싶어 연일 쏴대는 변명과 선동이 오히려 남한 인민을 냉정하게 만들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이명박 패당’ 운운하는 북한 당국의 격문에서 거친 어조와 격렬한 어휘를 살짝 바꾸면 이번 선거를 정권 중간평가로 삼고 싶은 야당의 심정과 비슷해진다. ‘선거용 전쟁놀음을 심판하자’는 야당의 외침이 날로 고조되는 전쟁 위기 때문에 그럴듯하게는 들리는데, ‘얻어맞았는데 어찌하리’라는 유권자의 반응에 야당의 속이 타들어가는 것이 요즘의 분위기다. 야당으로선 정말 시운이 없는 셈이다. 여당의 약점이 없는 것도 아닌 차에, 4대 강 시비, 빈곤층, 일자리, 무상급식 등 진보세력이 즐겨 써먹을 유용한 쟁점들이 녹슨 폭탄처럼 아무리 두드려도 반응이 없다. 내일 선거는 분명 대선의 전초전이다. 집권당을 긴장시키지 못한 채로 보낸 2년은 차기 정권의 리더십을 흐리멍덩하게 만든다. 그런데, 지금의 야당들은 유권자의 비판의식에 날을 세워줄 스타급 정치인의 결핍증을 극심하게 앓고 있다.



그래서인지 도시처럼 농촌의 표심도 흐리멍덩하다. 필자가 십 년 넘게 연고를 가진 강원도 산촌 농부들에게도 북한의 괘씸한 소행이 올봄의 냉해, 값이 곱절로 뛴 비료, 줄어든 농가 지원에 대한 불만을 잠재우고 있었다. 아예 농촌 문제는 얘깃거리도 아니었다. 온종일 산골을 뒤지며 발품을 판 무소속의 어떤 후보는 논둑의 막걸리판에 잡혀 농부들이 벌인 북한 성토를 청취해야 했다. 그가 눈치 보며 돌린 선거용 명함의 문구, ‘농업인과 함께 생활자치 실현!’에 관심을 보인 농부는 없었는데, 오히려 이장(里長)의 느닷없는 제안엔 솔깃해했다. 거리를 가득 메운 저 현수막을 가을이 오기 전에 확보할 계략에 대해서 말이다.



산비탈이나 골짜기 논밭은 벌써 야생동물들의 야식당(夜食堂)이 된 지 오래다. 산골 농부치고 개체수가 늘어난 멧돼지와 고라니의 피해를 받지 않은 사람은 드물다. 그들의 야간 습격을 막는 효과적인 수단이 현수막을 둘러치는 것임을 안 뒤에 산골 풍경은 사뭇 달라졌다. ‘개인 파산 신청하세요’ ‘미수금 받아줍니다’, 뭐 이런 으스스한 내용의 현수막들이 산기슭과 논두렁을 분할 점령했다. 올가을엔 ‘일자리 먼저, 서민 먼저!’ ‘MB 심판, 복지혁명!’ ‘시민주권, 사람특별시!’ 이런 현수막이 어지러울 텐데, 멧돼지 가족이 ‘기호 몇 번’을 뚫고 야식당에 침입할지 궁금하다. 이장님에게 선거는 현수막이었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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