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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Special 인터뷰] 고추상추 키우는 재미, 톱 스타의 소박한 삶 하춘화

중앙일보 2010.05.29 00:01 주말섹션 6면 지면보기
21일 오전 서울 청계산 밑자락의 주말농장. 청바지 차림에 호미를 든 50대 여인이 나타났다. 생기 있게 밭을 누비는 그는 가수 하춘화(55)였다. ‘무대의 여왕’으로 불리는 그는 6세에 데뷔해 내년이면 마이크를 잡은 지 50년이 된다. 세상은 그를 ‘화려한 조명’과 함께 기억한다. 그러나 ‘인간 하춘화’의 삶은 소박했다. 오전 5시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한다. 결혼 15년째 남편(61)의 아침상을 직접 차린다.


MB·전·YS-이희호·권양숙 여사, 내 공연 초청해 어울리게 하고 싶어요

아파트의 11년 이웃인 유영희(60·여)씨의 귀띔이다. “흔한 명품백 한번 들지 않아요. 종이 한 장 허투루 버리는 것도 못 봤어요.” 그의 질박한 삶과 ‘도시 농사꾼’으로의 변신은 애초부터 맞닿아 있던 걸까. 밭 한편에서 잔치국수 한 그릇을 나누며 농부를 꿈꾸는 톱스타의 속내를 들어봤다.



글=이진주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하춘화는 5년 전 앞집의 의사 부부에게서 상추 한 봉지를 받았다. 밭에서 방금 따온 것이었다. “잎이 아기 속살처럼 보드랍고 향기로웠어요.” 그는 케이크로 화답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채소와 답례가 오가길 몇 번, 하춘화는 작정했다. 올봄 청계산 주말농장에 10만원을 내고 9.9㎡(3평)짜리 밭을 분양받은 것이다. 첫 농사에 상추·열무·치커리와 고추·가지·방울토마토까지 심었다.



● 유기농 채소라면 사다 먹어도 될 텐데요.



“제 이름이 춘화(春花)잖아요. 원래 식물을 좋아했어요. 식단도 채소와 과일 위주고요. 친정 어머니가 채식주의자예요. 와인 애호가들이 맛을 잘 구분하듯 저도 ‘풀맛’은 좀 알죠. 직접 키워보고 싶은 욕심이 컸어요.”



● 드레스만 입을 것 같은데 상상이 잘 안 됩니다.



“이 나이에 제 별명이 공주라데요? 저도 처음엔 엄두가 안 났어요. 그런데 쉰다섯 살이 되니 하고 싶은 일은 미루면 안 되겠더라고요. 남편이 경기도 일산에서 자라 농사를 잘 알아요. 제 과외 선생님이죠.”



정말 그랬다. “뿌리가 상하지 않게 조심해서 돌리듯 따요.” “흙까지 젖도록 물은 충분히 주고….” 남편이 속삭이듯 훈수를 뒀다. 그는 얼마 전까지 모 지상파 방송국의 행정부서 간부였다. 최근 장인 하종오(90)옹의 육영사업을 물려받았다. 남편을 만난 건 16년 전. 같은 방송국에 다니던 언니의 친구가 소개했다. 별명이 ‘영국 신사’라더니 너무 숫기가 없었다. 프로듀서(PD)였던 언니 친구가 남편을 대신해 하춘화가 좋아하는 ‘흑장미 백송이’를 보냈다. 그게 프러포즈였다.



● 옆에서 보니 마치 아이를 다루듯 농작물을 매만집니다.



하춘화가 마이크 대신 호미를 들고 농장에 섰다. 청바지가 화려한 드레스를 대신했고, 따뜻한 봄 햇살은 무대 조명이 됐다.
“남편이 더 열심이에요. 농작물을 ‘얘네들’이라고 부를 정도니까요. 집에서도 눈앞에 아른거린대요. 곧 전원주택을 짓고 마당 있는 집에서 살기로 했어요. 경기도 양평이나 파주로 가려고요. 저는 원래 도시를 더 좋아했는데, 요즘 자꾸 마음이 흔들려요. 정원에서 제가 좋아하는 부추나 쑥갓도 키워보고 싶고요. 막상 밭일을 해보니 얼마나 신기하고 재미있는지 몰라요. 며칠 전엔 처음으로 상추를 뜯어다 먹었어요. 딸 때는 너무 예쁘고 아까워 손까지 떨리더라고요.”



그러고 보니 그에겐 아이가 없다. 아주 없었던 건 아니었다. 신혼 무렵 한 생명이 잠시 머물다 갔다. 결혼 생활과 빡빡한 공연 스케줄, 다시 시작한 공부까지 모든 것을 움켜쥐고 뛰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 그는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임신한 줄도 몰랐다. 조직검사를 하고서야 유산이란 걸 알았다. 그 뒤로 지금까지 소식이 없다. “화려한 무대에서 내려와 여자로 돌아오는 밤이면, 잃어버린 아이에 대한 회한이 뼈에 사무쳤지요.” 그런 그를 지탱한 건 노래였다.



● 아이 때문에 많이 힘드셨겠군요.



“집착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죠. 사실은 2년 전까지 시험관 시술을 받았어요. 제가 올해로 쉰 다섯인데, 쉰 셋이 되도록 포기를 못했던 거죠. 너무나 아이를 원했고, 간절히 기도하면 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안 되더라고요.”



그의 눈에도, 목소리에도 물기가 어렸다. 꾸미기 어려운 게 목소리다. 국수 그릇 사이로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 어릴 때 세례를 받았다는데 신을 원망하진 않았나요.



“처음엔 그랬어요. 영화 ‘밀양’의 전도연씨처럼 가슴을 치며 신께 대들기도 했죠. 그런데 생각해보니, 저는 참 많이 받은 사람이었어요. 노래만이 아니고요. 그런데 딱 한 가지, 아기만 안 주신 거예요. 죽을 만큼 애썼는데 안 된다면 뭔가 뜻이 있겠죠. 작고한 코미디언 이주일씨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다 키워서 잃었어요. 그때도 제 일처럼 울었지요. 주었다 도로 거두는 뜻은 또 뭔지 이해하기 힘들었어요.”



● 그리 간절했다면 입양은 생각 안 했나요.



“아이를 얻을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연구했어요. 그런데 인연이 안 되더라고요. 어느 분이 보다 못해 말했지요. 꼭 ‘내 자식’으로 키울 생각하지 말고, 멀리서 많은 아이들을 도와주라고요. 보육시설에 있는 아이들처럼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 말이에요. 사실 제가 ‘제자와 후배, 아이들’ 복이 많아요. 큰언니네 조카 둘은 ‘하춘화에게 애가 있다’는 소문이 날 정도로 애지중지 키웠고요. 그럼 된 거죠.”



배로 낳은 자식은 없지만 유쾌한 밭농사처럼 그는 늘 씩씩하다. ‘마음의 자식’을 낳을 준비에 더욱 그랬다. “제 모든 걸 쏟아부어 하춘화 음악학교를 만들 겁니다. 미국의 줄리아드같이 이름을 날리는 음악학교를 세우는 게 꿈이에요. 우리 대중음악이 더 귀하게 평가받는 토대가 됐으면 좋겠어요. 조만간 선보일 거예요.”



● 가수 해서 번 돈으로 학교를 세우면 무엇이 남을까요.



“내 인생이 행복해지는 거죠. 참 잘 살았다는 행복감.”



● 그만하면 편하게 살아도 될 텐데, 모범생 숙제하듯 살아온 삶이 억울하진 않나요.



“하루의 일이 밀리면 평생의 삶이 늦춰져요. 모든 것이 무너지죠. 단 한 번도 발 뻗고 누워서 쉬어본 일이 없지만, 그게 편해요.”



그런 열정에 박사 학위도 취득했나 보다. 하춘화는 2006년 성균관대에서 예술철학 박사를 땄다. 네 자매 중 그를 포함해 셋이 박사다.



● 가족들 성격이 모두 비슷한가요.



“네 자매 중 제가 아버지를 빼닮았어요. 아버지는 77세일 때 제 인터넷 홈페이지를 직접 만들어 주셨어요. 구순인 지금까지도 손수 관리할 정도로 철저하고요. 아버지가 녹화한 테이프와 신문·잡지 스크랩만도 가요사 80년의 절반을 아우르는 방대한 분량이에요.”



● 그중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를 들려주세요.



“동양방송(TBC) 시절 ‘방송가요대상’ 내부 규정을 깨고 4회 연속으로 ‘여자 가수상’을 받았어요. ‘다른 여가수를 압도하는 득표수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취지의 심사평이 발표될 정도였죠. TBC 소유의 ‘연포 해수욕장’은 당대 최고의 휴양지였는데, 제 노래 ‘연포 아가씨’가 종일 흘러 나왔대요. 아버지가 모은 역사적인 방송 자료들은 중앙일보가 새 방송을 시작하면 기증할 생각이에요.”



● 스캔들 한번이 없었습니다.



7세 때의 하춘화
“아버지 가르침이 엄격했어요. 본격적으로 인기를 얻은 16세 때부터 기부를 시작한 것도 그래요. 아버지는 대중의 사랑만 훔치는 ‘딴따라’가 아니라, 그걸 사회에 돌려주는 ‘문화예술인’이 되라고 늘 강조하셨죠.”



실제 하춘화는 의미 있는 공연마다 기부에 적극 나섰다. 1974년 첫 ‘리사이틀’을 연 뒤엔 안양의 나환자 자녀들에게 당시 돈으로 500만원을 건넸다. 서울의 330.6㎡(100평)짜리 집 한 채가 200만원일 때였다. 2006년에 열린 가수 데뷔 45주년 공연의 무대 수익금 1억5000만원은 서울시 환경미화원 자녀들에게 전달했다. 내년 설쯤 무대에 올릴 50주년 행사도 사회봉사공연으로 꾸밀 계획이다.



어느새 국수 그릇을 비운 하춘화가 다시 상추를 다듬었다. 마치 밭에 심은 작물들에게 들으라는 듯, 아기들을 어르듯 그가 호미를 들고 한 곡조 뽑았다. “사랑이 야속하더라~, 가는 당신이 무정하더라~.” 옆에서 남편이 채워준 물뿌리개를 받아 고루 물도 줬다. “아, 열무 싹 예쁜 거 봐요” “다음 주엔 토마토 지지대 세워야겠네.” “고추는 언제 열리지?” 즐거운 인생, 소녀가 따로 없었다.



j 칵테일 >> ‘대통령과 나’



하춘화는 6명의 대통령과 인연이 있다. 무대를 50년간 주름잡은 여왕답다. 1970년대 전성기에 그를 ‘보배’라고 부르던 박정희 전 대통령은 언젠가 공연이 끝나고 메모지를 내밀었다고 한다. “‘강원도 아리랑’ 노래를 좋아하는데 도대체 어디서 숨을 쉬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하소연이었다. “대통령이 일개 유행가 때문에 고민하는 모습이 마냥 신기했지요.” 85년 일본에서 활동할 무렵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귀국하라”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뜻이 전해져 왔다. 분단 40년에 치러지는 ‘남북 예술인 교환공연’에 여가수 대표로 평양 무대에 서라는 전갈이었다. 전 대통령은 하춘화의 노래 중 ‘영암 아리랑’과 ‘무죄’를 가장 좋아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애창곡은 알려진 대로 ‘베사메무초’다. 하춘화는 청와대에서 대통령과 듀엣으로 이 노래를 불렀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하씨의 노래에 관심이 없었다. 공연 초대장을 들고 청와대를 찾아가자 거절하면서 한마디 했다. “나는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데.”



서거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야인’ 시절 처음 만났다. 서울 워커힐호텔에서 집필하던 김 전 대통령이 하씨의 공연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 자신의 노래는 아니었지만 ‘목포의 눈물’을 신청하기에 진심을 다해 불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만난 적이 없다.



이명박 대통령은 서울시장 재직 때 알게 됐다. 2006년 45주년 공연이 끝난 뒤 시장실에서 환경미화원 노조위원장에게 성금 1억5000만원을 전달하자, 당시 이 시장은 “하춘화의 팬이 되겠다”며 고마워했다. “전직 대통령과 이희호·권양숙 여사, 이명박 대통령을 모두 공연에 초대해 미움을 풀고 한데 어우러지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 내년 데뷔 50주년을 맞는 하춘화의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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