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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지만 강한 대학, 그곳에 또 하나의 아이비리그 있었다

중앙선데이 2010.05.23 03:37 167호 10면 지면보기
‘내 인생을 바꾸는 대학’을 선택한 가정이 모였다. 왼쪽부터 김태룡씨, 벨로이트에 다니는 김태룡씨의 아들 철영, 김현대씨, 세인트존스에 입학하는 김현대씨의 딸 태은. 신인섭 기자
2008년 12월 말, 한 송년 모임이 내 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당시 외고 유학반 3학년이었던 딸은 미국 대학 여러 곳에 지원서를 보내고 있을 때였다.

이름보다 실속, 미국의 교양학부 대학들

우연히 같은 테이블에 김현대(현 지역 선임기자) 한겨레 지역경제디자인센터 소장이 동석한 것은 행운이었다. 송년 모임이 으레 그렇듯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가 오가다 자녀 대학 진학 화제로 옮겨갔다. 그때 김 소장이 자신이 번역한 책 얘기를 꺼냈다. 『내 인생을 바꾸는 대학(작은 사진)』이었다. 작지만 강한, 미국의 교양학부 대학(liberal arts college) 40곳을 소개한 내용이라고 했다.

구미가 살짝 당겼다. 당장 다음 날 그 책을 샀다. 불과 2개월 전에 출간된 따끈따끈한 책이었다. 뉴욕 타임스의 교육 에디터였던 로런 포프가 직접 미국 전국을 돌아다니며 고르고 고른, 특별한 대학들이 소개돼 있었다. 교양학부 대학은 전공을 강조하는 일반 종합대학(university)과 달리 인문, 사회·자연과학과 예술, 글쓰기 등 전반적인 교양과목을 깊이 다루는 학부 중심 대학이다.

목록을 훑어보니 40개 대학 중 한 번이라도 이름을 들어본 곳은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다녔다는 리드(Reed)뿐이었다. 나머지 대학은 요즘 애들 표현대로 ‘듣보잡(듣도 보도 못한 잡놈)’이었다.

앞에서부터 차근차근 읽어갔다. 저자가 그 대학들의 좋은 점만 나열해서인진 몰라도 모두 ‘진흙 속에 묻힌 보석 같은 대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과· 학년· 학점도 없고 학생 주도로 전공 계획을 설계하는 햄프셔 대학 ▶하버드 이상의 지적 노력을 요구하는 말버러 대학과 뉴 대학 ▶아이비리그 교수의 자녀들이 가장 많이 다닌다는 얼햄 대학 ▶고전 100권을 읽고 토론하는 것이 4년 커리큘럼의 전부인 세인트존스 대학 ▶K 플랜(풍부한 인턴십, 3학년 해외 학기, 4학년 개인 프로젝트)의 칼라마주 대학 등이 나의 관심을 끌었다.

당사자의 의견이 중요했다. 책을 정독한 딸의 의견도 나와 거의 비슷했다. 그중 세 곳 정도가 마음에 든다고 했다. 미국 대학은 10개든 20개든 제한 없이 지원서를 낼 수 있다(물론 비용이 부담이 되긴 하지만). 딸은 우리가 익히 아는 대학 10여 곳에 지원서를 낸 뒤 이 세 곳을 추가했다.

기다림의 시간. 합격통지서가 이어졌다. 총 9개 대학이었다. 학교와 친구들은 당연히 이름이 잘 알려진 대학에 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심사숙고한 딸의 최종 선택은 칼라마주(Kalamazoo) 칼리지였다.

전교생 1300여 명. 교수와 1대1 상담이 언제든 가능한 곳, 처음부터 전공을 정하지 않고 관심 분야를 마음껏 공부할 수 있는 곳, 다양한 프로그램이 딸의 마음을 잡았다. 아, 한국 사람이 많지 않은 소도시라는 점과 장학금 지급도 작용하긴 했다.
딸은 추위를 많이 탄다. 그런데도 강추위로 악명 높은 미시간주의 칼라마주를 선택한 것이다.

칼라마주 입학으로 생각을 굳힌 뒤 인터넷 검색을 하다 보니 최태원 SK 회장의 어머니인 고 박계희 여사가 칼라마주 칼리지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오 이런! 나는 내 딸이 교포나 조기 유학생을 제외하고 한국에서 고교를 졸업한 뒤 칼라마주에 입학한, 첫 한국인인 줄 알았다. 그런데 1950년대에 경기여고를 졸업하고 칼라마주를 다닌 선배가 있었다니.

지난해 8월 말, 딸은 혼자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입학식을 하기 전, 3주간에 걸친 캠프(LandSea)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한국에서 캠프 경험이 거의 없었던 딸은 “미국 애들 캠프가 정말 장난 아니다”라고 했다. 진짜 힘든 일정이었지만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이라고 했다. 처음 접한 카누도 제대로 배워서 수준급이 됐다. 특히 캠프 마지막에 혼자 숲 속에 들어가 48시간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명상을 하는 ‘솔로(solo)’는 인생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귀중한 시간이었다고 한다. 캠프에 참가한 유일한 외국인이었기에 짧은 시간에 많은 미국인 친구도 사귈 수 있었다.

칼라마주는 쿼터제다. 9월 말부터 12월 초까지 가을 학기, 1월 초부터 3월 중순까지 겨울 학기, 3월 말부터 6월 초까지 봄 학기다. 한 쿼터는 10주 과정인데 이 동안에 수업하고, 토론하고, 시험 본다(중간고사를 과목당 두세 차례 본다). 고등학생 때는 공부하는 데 별로 열의가 없던 딸아이가 그렇게 빡빡한 생활 속에서도 “공부가 재미있다”고 한다.

교양학부 대학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가 딱히 ‘무엇을 전공할지 몰라서’였다. 그런데 첫 번째 가을 학기를 마치고 나서 ‘통계’를 전공하겠다고 했다.

통계라니? 외고 나온 애가, 수학은 거의 하지 않았던 애가 느닷없이 통계를 전공하겠다니 깜짝 놀랐다. 통계를 공부해 보니 의외로 재미있고, 자기 적성에도 맞는 것 같다고 했다. ‘숨어 있던’ 적성을 찾은 것일까?

기대했던 대로 교수님들은 친절했다. 학생 수가 적으니 진로 지도는 물론 개인 고민 상담도 가능했다. 통계 전공 결정도 지도교수님과의 깊은 의논 끝에 나왔다고 했다. 종합대학이라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수학과 학생들에게 악명 높은 ‘천재 교수님’이 있다. 자기가 실력이 있다 보니 과정을 건너뛰어 강의를 하고, 학점도 엄청 짜서 기피 대상이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찾아가 질문을 하면 그렇게 친절하게 가르쳐 줄 수가 없다고 한다. 딸은 그 교수님을 좋아한다.

한 학기를 더 지나더니 컴퓨터 사이언스를 부전공으로 하겠다고 한다. 이거 점입가경이다. 우리 부부는 딸이 문과 체질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칼라마주에 가서 완전히 뒤집었다. 좀 당황스럽긴 하지만 바람직한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전체 유학생은 50명 정도. 이들을 위한 학교의 배려도 고마울 정도다. 유학생마다 직원 한 명씩을 배정한다. 이들은 공항 픽업은 물론 학교 생활에 빨리 적응할 수 있도록 온갖 뒷바라지를 해준다. 가끔 집에도 초대해 외로움을 달래주기도 한다. 신입생 때 인연을 맺은 ‘호스트 패밀리’는 졸업 때까지 이어진다. 딸을 혼자 미국에 보내놓고도 크게 걱정하지 않는 이유다.

딸의 고등학교 친구들이 지금 아이비리그를 비롯해 미국 전역의 대학에 흩어져 있다. 이들은 ‘페이스북’을 통해 서로의 소식을 나눈다. 딸은 자신이 학교 선택을 잘했다고 믿는다. 아이비리그보다 칼라마주가 더 좋다는 말이 아니다. 번잡한 것과 획일적인 것을 싫어하는 딸의 성격상 큰 학교보다 작은 학교가 맞다는 얘기다.

부모 입장에서 불만은 있다. 학교가 작다 보니 미식축구, 농구, 야구 등 미국 대학생이라면 대부분 즐길 만한 대형 이벤트를 접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며칠 전, 김현대 소장이 전화를 했다.
“제 딸이 이번에 세인트존스로 갑니다.”

세인트존스. 4년 동안 고전 100권을 읽고 토론하는 것이 커리큘럼의 전부인 학교. 우리도 고려하긴 했지만 너무나 파격적이라 결국 대상에서 제외시켰던 학교다.

김 소장은 역시 내 인생을 바꾸는 대학의 옮긴이답다.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은 딸은 세인트존스(St. John’s)와 세인트올라프(St. Olaf) 대학을 놓고 고민했다고 했다. 세인트올라프는 국제학과 수학, 음악 분야가 뛰어나고 사회봉사를 많이 하는 대학이다. 그의 딸은 “고전 100권을 읽고 토론하는 특별한 공부를 해낼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에다 세인트올라프의 학풍이 마음에 들었지만, 세인트존스를 포기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따지고 보면 세인트존스야말로 진정한 교양학부 대학이라고 할 수 있다. 분야별 고전을 읽고 토론하면서 자연스레 여러 분야의 실력을 쌓아간다. 독서량은 상상을 초월한다. 세인트존스 학생들이 1주일에 읽어야 하는 양은 300~500쪽에 이른다. 철학, 기하학, 의학 등 결코 가볍게 읽을 책들이 아니다. 이걸 읽고 토론하고, 자기 철학이 담긴 에세이를 써야 한다. 헬라어와 프랑스어도 배워야 한다.

김 소장의 딸은 3만 달러 이상의 장학금을 받는다고 했다. 미국 대학들은 외국인 학생(학부생)에겐 장학금을 거의 주지 않는다. 미국 경제가 휘청거리면서 대학도 타격을 받은 이후엔 더 심해졌다.

그러나 책에 소개된 ‘착한 대학’들은 종합대학에 비해 외국인 학생 장학금 비율이 높은 편이다.

김 소장의 소개로 이 책을 접한 뒤 아들을 위스콘신주 벨로이트(Beloit) 대학에 보낸 김태룡(해마루에너지 대표)씨도 만났다. 인류학과 국제학, 경제학에 뛰어난 벨로이트는 학생들의 글쓰기에 특히 신경을 많이 쓰는 학교다. 아들이 나중에 뭘 하더라도 대학에서 인생의 기초가 되는 인문학을 많이 배우길 원했던 김씨는 별다른 고민도 하지 않고 벨로이트로 결정했다. 아들도 아버지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지난해 가을에 입학해 1년을 보낸 아들의 벨로이트 평가 역시 “대만족”이다. 수업 시간 외에도 교수님과 격의 없이 차를 마시며 대화하고, 인생을 논의하는 것이 정말 좋다고 했다.

한국에서 ‘미국 대학’ 하면 동부의 아이비리그와 서부의 스탠퍼드, UC버클리, UCLA 등을 떠올린다. 그러나 아이비리그라 해도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 정도만 알지 다트머스나 브라운을 모르는 사람도 많다. 하물며 교양학부 대학을 알 리가 없다. 교양학부 대학 ‘빅3’로 불리는 앰허스트(Amherst), 스와스모어(Swarthmore), 윌리엄스(Williams)도 생소하긴 마찬가지다. 이들은 아이비리그와 맞먹는 실력이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딸 친구의 언니가 3년 전 스와스모어에 입학했다. 그런데 그 어머니가 친구에게 “넌 제발 아이비리그에 가라”고 했단다. 만나는 사람마다 스와스모어가 어떤 학교냐고 물어봐서 일일이 설명하느라 지쳤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친구 역시 어머니의 바람을 저버리고 언니 따라 스와스모어에 갔다.

미국 대학으로 유학을 보내는 게 간단한 일은 아니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미국 대학을 나왔다고 해서 장래가 보장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왕 돈 들여서 힘들게 가는데 ‘어디’ 하면 누구나 아는 대학에 보내야 하지 않느냐는 게 일반적인 생각이다.
하지만 생각을 뒤집으면 세상도 바뀐다. 유학도 유학 나름이다. 돈을 거의 들이지 않고도 다양한 공부를 할 수 있는 대학도 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딸은 이제 대학 생활 1년을 마쳤다. 현재 우리 부부와 딸의 평가는 모두 ‘잘한 선택’이다. 딸의 장래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앞으로의 대학 생활이 의미 있고, 재미있고, 보람이 있으리라는 것은 의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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