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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에서 발견된 머리카락 DNA로 진짜 유골 확인

중앙선데이 2010.05.23 03:33 167호 12면 지면보기
‘코페르니쿠스(Copernicus)적 전환’이라는 표현은 칸트가 자신의 철학이 이전의 철학과 크게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고안했다. 칸트(1724~1804)나 동시대 사람들에게 코페르니쿠스는 혁명과 동의어였다. 1960년대 유행하기 시작한 ‘패러다임 전환’이라는 말도 코페르니쿠스를 패러다임으로 대체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1473~1543)는 민주주의 혁명, 산업혁명과 더불어 서구의 근대를 낳은 3대 혁명 중 하나인 과학혁명의 선구자다. 그는 1543년 출간한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에서 지동설을 전개함으로써 근대 천문학의 아버지가 됐다.

코페르니쿠스 장례 미사 467년 만에 다시 열린 까닭

폴란드에서는 20일부터 3일간 코페르니쿠스 유해의 재매장을 기념해 미사·공연·전시·학회 등 각종 행사가 개최됐다. ‘코페르니쿠스 랩소디’라는 곡도 작곡됐다. 코페르니쿠스의 유해는 22일 올해로 창립 750주년을 맞은 플라우엔부르크 대성당에서 장례 미사 후 제단 밑에 안장됐다. 인구가 2500명인 플라우엔부르크는 폴란드와 세계 각지에서 온 손님으로 북적거렸다.

467년 전 사망한 코페르니쿠스의 장례 미사를 다시 거행하게 된 사연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무덤의 소재는 수백 년간 미스터리였다. 특히 지난 200년간 코페르니쿠스의 무덤을 찾기 위한 시도가 수차례 있었지만 허사였다. 1807년 나폴레옹도 코페르니쿠스의 무덤을 찾다 실패했다. 무덤 찾기는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까지 계속됐다. 공산 정권 시절에는 정부와 교회의 관계가 껄끄러워 유해 찾기 작업이 순조롭지 않았다.

2005년 8월 희소식이 있었다. 14세기에 건축된 플라우엔부르크 대성당 제단 밑을 파고 들어가자 여러 구의 유해가 발견됐는데 그중 코페르니쿠스의 것으로 보이는 아래턱이 없는 두개골과 다리뼈 등이 나왔다. 유해의 주인공은 사망 당시 연령이 60~70세로 추정됐다. 부러진 코, 왼쪽 눈 위 흉터 등 두개골의 특징이 현존하는 코페르니쿠스 초상화에 나타난 모습과 일치했다. 2008년 11월 20일 폴란드와 스웨덴의 공동 연구진은 유전자 대조 결과 코페르니쿠스가 사용하던 책에서 발견한 머리카락 9개 중 2개와 이빨의 지놈 서열이 일치했다고 발표했다. 학자들은 코페르니쿠스의 눈이 초상화를 통해 알려진 것과는 달리 벽안이라는 것을 밝혀내기도 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유해 발견은 일면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1749~1832)는 “코페르니쿠스의 학설만큼 인간 정신에 지대한 영향을 준 발견이나 견해는 없다”며 코페르니쿠스를 극찬했다. 그러나 유해 발견 당시 코페르니쿠스의 명성은 1492년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1446?~1506)의 명성과 마찬가지로 흠집내기의 대상이었다. 아메리카 대륙은 콜럼버스가 아니라 아메리카 인디언, 켈트족, 바이킹족, 이집트인, 유대인, 중국인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코페르니쿠스도 비슷한 도전을 받고 있다. 비록 그가 기원전 2세기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중심 모델을 대체했지만 지동설을 고대 그리스 철학자, 중국인, 인도인, 마야인, 아랍인 등이 먼저 알고 있었다는 점이 지적된다.

과학사에서 코페르니쿠스가 이룩한 업적을 평가하는 문제는 세계사 속에서 서양사를 어떻게 자리매김할 것인가 하는 논란과 연관된다. 한편 코페르니쿠스 자신이 여러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우선 코페르니쿠스의 국적 논란이 있다. 공산주의 시절에도 코페르니쿠스는 폴란드의 민족 영웅이었다. 그는 다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낸 폴란드의 자랑이다. 그는 수학자·외교관·행정가였으며 지도 제작자이기도 했다. 명의(名醫)로도 소문났다. 코페르니쿠스는 “악화(惡貨)는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한다”는 그레셤의 법칙(Gresham’s law)의 내용을 토머스 그레셤보다 70년 앞선 1526년에 발표했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를 폴란드인이 아니라 독일인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줄기차게 제기됐다. 그는 폴란드에서 태어나 활동했지만 그가 살던 지역은 폴란드 내 독일인 공동체 지역이었다. 코페르니쿠스는 문서를 라틴어로 작성했으나 일상생활 속에서는 독일어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가끔씩 독일의 신문·잡지들이 코페르니쿠스를 독일이 낳은 위대한 인물로 봐야 한다는 기사를 내보내 폴란드 사람들을 분노하게 했다. 이번에 폴란드에서 코페르니쿠스 재매장 행사를 성대하게 거행한 목적 중 하나는 이러한 논란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다.

종교와 과학의 관계에 있어서도 코페르니쿠스는 논란의 중심에 있다. 전설에 따르면 코페르니쿠스는 사망 직전에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의 인쇄본을 받아 봤다. 그가 책의 출간을 늦춘 이유는 교회의 탄압을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학계의 중론에 따르면 출간이 늦어진 것은 교회의 반응이 두려워서라기보다 집필의 엄정성을 위해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1543년 출간된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가 금서목록에 등재된 것은 1616년, 삭제된 것은 1835년이다. 갈릴레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코페르니쿠스의 사례는 교회사의 어두운 면이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이 이단시된 이면에는 가톨릭과 개신교 간의 갈등이 한몫했다. 1600년까지는 코페르니쿠스 체제에 대해 가톨릭교회는 공식 입장이 없었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의 이단 학설에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은 가톨릭교회가 이단이기 때문 아닌가’라며 개신교 측이 이의를 제기하자 가톨릭교회는 1610년부터 공식적으로 반대 입장에 서게 된다. 이번에 성대하게 코페르니쿠스의 장례 미사를 거행한 이유는 과거에 있었던 가톨릭교회와 과학의 충돌을 정리하겠다는 의도와 무관하지 않다. 한편 코페르니쿠스는 신부로 알려졌으나 그가 사제 서품을 받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큰 것으로 사학계는 판단하고 있다.

코페르니쿠스의 이름을 딴 ‘코페르니쿠스 원리(Copernican principle)’는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 아니며 지구는 천체 중에서 특별하지 않다”라고 일깨운다. 다윈의 진화론 또한 인간이 동물 중에서 특별하지 않다는 점을 주지시킨다. 최근 인류는 인공 생명체를 만들기 위한 기술 개발에 한층 다가서고 있다. 인간은 ‘생명체를 만드는 생명체’라는 ‘특별한’ 생명체가 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이 이뤄질 때마다 인류는 코페르니쿠스를 떠올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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