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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쉐량에게 저우언라이 ‘16字 밀서’ 전달한 주메이윈

중앙선데이 2010.05.23 03:30 167호 33면 지면보기
1929년 10월 결혼을 앞둔 주메이윈.
저우언라이는 장쉐량, 장제스, 쑹메이링과 함께 시안사변의 주역 중 한 사람이었다. 전 중국의 2인자 장쉐량을 설득했고 두 사람은 의기가 투합했다. 장은 “내전을 중지하고 국공 양당이 합작해 침략자 일본과 전쟁에 돌입할 것”을 촉구하며 최고통수권자 장제스를 감금했다. 장제스는 이들의 요구를 수용하고 장쉐량을 연금시켰다. 그리고 8년간 항일전쟁을 지휘해 승리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66>

장쉐량 덕에 기사회생한 중공은 전쟁이 끝나자 여세를 몰아 전 중국을 장악했다. 장을 데리고 대만으로 철수한 장제스는 마지막 숨을 몰아 쉬는 순간까지 장에게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대륙의 저우언라이는 죽는 날까지 신(新)중국의 총리 직을 유지했다. 장쉐량을 ‘영원히 변할 수 없는 공신(千古功臣)’으로 치켜세우는 것을 잊지 않았다.

1961년 12월 12일 밤, 시안사변 25주년 기념식이 인민대회당에서 열렸다. 장쉐량을 회상하는 저우언라이의 한마디 한마디가 듣는 이들의 폐부를 찔렀다. 장의 부하였던 동북군 출신 장군들과 당 간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훌쩍거렸다. 저우는 “이 눈물은 중국공산당이 흘리는 눈물”이라며 연신 손수건으로 눈을 훔치고 코를 풀어댔다. 귀가 후에도 좀처럼 잠자리에 들려 하지 않았다. 넋 나간 사람처럼 창밖을 보며 한숨만 쉬어댔다.

베이징의 자택에서 딸들과 함께한 주치진(앞줄 가운데)과 두 명의 부인. 1930년 장쉐량은 주치진에게 베이징 시장을 권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나는 망한 정권의 총리, 시장 자격이 없다”며 고사했다. 1964년 2월 베이징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고건축과 전통공예 연구로 일가를 이루었다. 김명호 제공
저우언라이는 장쉐량에게 친필 편지를 보낼 결심을 했다. 관련 부서는 편지를 전달할 밀사를 물색했다. 홍콩에 거주하는 주메이윈(朱湄筠)이 적임자였지만 접촉이 불가능했다. 저우는 북양정부의 국무총리를 역임한 고건축 연구가 주치진(朱啓금)의 집을 방문했다. 주는 슬하에 5남10녀가 있었다. 딸 두 명이 장쉐량의 비서와 결혼했고 셋째 딸은 장의 제수였다. 주는 즉석에서 다섯째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작성했다.

저우언라이도 편지를 완성했다. “부디 몸을 소중히 해라. 서두르지 말고 마음을 닦아라.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다.” 모두 16자, 수신인과 발신인은 적지 않았다. 장쉐량의 동생들에게도 편지를 준비시켰다.

주메이윈은 30년 전 장쉐량의 바람기 덕에 억울한 일을 겪은 적이 있었다. 일본군의 선양 점령 한 달 후 광시대학 총장 마쥔우가 장쉐량을 조롱하는 시를 발표했다. “자오씨 집안 넷째 딸과 풍류를 즐기고, 주씨의 다섯째 딸과는 미친 듯이 춤을 췄다. 훨훨 나는 나비(胡蝶)처럼 거리낌이 없었다. 사교계는 영웅들의 무덤. 남의 나라 군대가 성곽을 깨는 줄도 몰랐다. 야반에 급보를 받았지만 음악소리 작다며 투정만 해댔다….” 전 중국이 발칵 뒤집혔다. 장쉐량의 부인이나 다름없었던 자오씨 집안 딸은 억울해할 일이 없었지만 주씨의 다섯째 딸 메이윈과 영화배우 후뎨(胡蝶)는 분통이 터졌다.

주메이윈은 장쉐량이 단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고급 캔디를 구입해 편지를 상자 바닥에 숨겼다. 대만에 건너가 6개월간 머무르며 기회를 살폈다.

62년 10월 10일 연금 중이던 장쉐량은 쑹메이링의 총무비서가 전해주는 캔디 한 상자를 쌍십절 선물로 받았다. 이튿날 아침 장의 몰골은 온밤을 꼬박 새운 사람의 모습이었다.

다시 30년이 흘렀다. 91년 가을, 캐나다에 살던 주메이윈은 자유의 몸이 된 장쉐량이 하와이에 거주한다는 보도를 접하자 자녀들 중 한 명을 데리고 달려갔다. 거동이 불편한 장의 앞에 무릎을 꿇고 대성통곡을 했다. 생존해 있다면 98세, 생사 여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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