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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용 회장을 추억하며

중앙선데이 2010.05.23 03:25 167호 34면 지면보기
10도 안팎을 넘나들던 수은주가 갑작스레 30도를 육박하고 있다. 꽃들이 언제 피려나 기다리다 잠시 한눈을 팔면 하루 이틀 새 피었다 사라져 버린다. 개나리·목련·벚꽃에 모란까지 뒤죽박죽 피어나더니 아카시아 향기도 급작스럽다. 어느 틈에 뒷산이 꽃으로 뒤덮였는지 분당 아파트 단지에 아카시아 향기가 출렁인다.

아카시아 향기는 나에게 말러의 5번 교향곡 4악장 아다지에토를 떠오르게 한다. 5년 전 5월 23일. 오늘처럼 아카시아 향기가 가득하던 저녁. 당시 근무하던 서울 예술의전당 사무실에서 받은 전화 한 통. 금호그룹 박성용 명예회장께서 폐암으로 돌아가셨다는 부음이었다. 예술의전당 음악당이 개관 18년 만에 새롭게 단장, 일주일 후 금호문화재단과 함께 세계적인 오케스트라를 초청하는 등 축제를 위해 튜닝을 하던 중이었다.

마음에 드는 연주가 끝나면 거침없이 일어나 브라보를 외치며 박수를 보내시던 분, 국내 최고의 현악 4중주단을 만들어 세계적인 실내악단으로 성장시키려 했던 분, 악기가 비싸 음악을 계속하기 힘든 연주자에게는 고가의 악기를 빌려 줬고 재능 있는 젊은 연주자가 세계적인 교향악단의 지휘자와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직접 뛰어다니시던 분. 한국의 에스테르하지 박성용 회장이 생전에 가장 좋아했던 곡이 바로 말러 5번 4악장이었다.

말러 교향곡은 관악 편성이 크고 웅장한 편이지만 5번 4악장에서 관악 주자들은 악기를 내려놓고 침묵으로 연주에 참여한다. 하프 연주로 시작한 4악장은 바이올린·비올라·첼로·더블베이스 등 교향악단 전면에 배치된 현악기만으로 연주된다. 1902년 작곡된 이 곡은 말러 부부의 신혼 시절 일화가 담겨 있다고 한다. 아내 알마 신들러가 교향곡 5번 악보를 옮겨 적다가 “금관이 너무 많지 않은가요?”라고 묻자 말러는 현악 중심의 4악장을 연서 대신 썼다는 것이다.

맑고 투명한 하늘 아래 꿈꾸듯 들려오는 느릿한 현의 화음은 이탈리아 감독 비스콘티의 영화 ‘베니스에서 죽다’의 배경음악으로 유명하다. 말러로 상정된 늙은 작곡가가 요양차 방문한 베니스에서 그리스 조각상 같은 미소년에게 빠진다. 미의 이상형에 대한 사랑으로 갈등하는 노작곡가는 사랑을 표현하지 못하고 안타깝게 주변을 배회한다. 그때 사랑의 고백을 음악으로 독백하듯 잔잔히 깔리는 곡이 아다지에토다.

또한 이 곡은 1963년 미국 케네디 대통령 장례식 때 번스타인의 지휘로 뉴욕필이 연주했다. 서울에서는 2005년 6월 7일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함께 내한한 지휘자 크리스토퍼 에센바흐가 연주 2주 전 돌아가신 박성용 회장을 추모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며 숨이 멎을 듯한 아다지에토를 들려줬다. 생전의 박 회장이 내한 공연을 성사시키기 위해 자신을 직접 만나고 음악적 대화를 나눈 기억에 대한 아름다운 답례였다.

이달 서울의 공연 캘린더는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BBC 방송교향악단, 모스크바 필 교향악단 등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의 내한 일정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매표 결과는 암울하다. IMF 때보다 힘들다는 소리도 심심찮게 들린다. 기업의 문화재단은 경영 평가에 따라 쉽사리 존폐가 논의되고 사업 방향이 변화된다.

마케팅을 위한 이벤트성 초청 공연은 늘어나지만 기업이나 정부의 지속적인 지원을 받는 공연은 보기 쉽지 않다. 하지만 문화는 지난한 과정을 견뎌야 소중한 성과를 얻을 수 있다. 20년 이상 기업과 기업인의 사랑을 넉넉히 받고 자랐던 ‘박성용 키즈’들이 증거다. 손열음·이유라·권혁주·고봉인….

아카시아 꽃 한 송이 한 송이가 모여 온 산, 온 동네를 향기에 취하게 한다. 문화의 향기가 메마른 마음을 적시듯, 말러의 아다지에토가 현의 화음으로 봄의 수많은 죽음을 추모하고 부활을 노래하듯, 힘든 시간을 견뎌 내고 이제 여름의 왕성한 기운으로 우리의 공연 시장이 건강하게 솟아오르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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