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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은 굴러가는 수레바퀴, 명예 지키는 법 배워야”

중앙선데이 2010.05.23 03:15 167호 14면 지면보기
송종의 전 법제처장이 양촌영농조합 내 정자에 앉아 검찰과 검사의 길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그는 “세상이 변했으니 검찰도 변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논산=조강수 기자
13일 오후 충남 논산시 양촌면 양촌리 356번지 양촌 영농조합법인. 15년 만에 만난 송종의(69·사시 1회) 전 법제처장은 작업복 차림에 모자를 눌러쓴 채였다. 처음엔 몰라볼 뻔했다. 성성한 백발이 예전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게 했다. 기자 명함을 내밀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사회부문 차장이 여기는 무슨 일로 왔어”라며 거리를 뒀다. 그가 사는 2층 양옥집인 ‘천고재(天古齋)’ 옆 정자에 마주 앉았다.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

충남 논산에서 영농조합 경영하는 송종의 전 법제처장

“검찰 떠난지 벌써 15년이야. 할 말 없어. 멀리서 왔으니 그냥 저녁이나 먹고 올라가.”

부산지검 검사 스폰서 사건 등으로 궁지에 몰린 검찰에 대한 얘기를 물으려는 기자의 생각을 읽은 듯했다. 퉁명스럽게 내뱉는 그에게 1993~95년 서울지검장과 대검 차장을 지낼 때 법조 출입기자로서 맺은 인연을 카드로 내밀었다. “그때 출입기자가 50명이 넘었는데 어떻게 다 기억해.” 모른다고 했지만 목소리는 한결 부드러워졌다.
“참 다행이었어. 그때 안 된 게 천우신조였던 것 같아.”

그는 김영삼 정부 때인 95년 9월 사시 1년 후배인 김기수 당시 서울고검장과의 경합에서 져 검찰총장이 안 된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는 얘기부터 꺼냈다. 그렇게 시작한 대화는 조합 사무실 2층의 ‘천목헌(天目軒)’, 인근 음식점에서의 막걸리를 곁들인 삼겹살 저녁으로 이어지며 5시간을 훌쩍 넘겼다.

-왜 검찰총장 안 된 게 다행이란 건가요.
“그 시절에 총장이 됐으면 말년이 편치 않았을 거야. 난들 괜찮을 수가 있나. 검찰은 굴러가는 수레바퀴야.”

김기수 총장이 2년 뒤 한보 사건을 재수사하면서 자신을 발탁한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씨를 구속하는 처지가 된 것을 염두에 둔 말이었다. 후배가 발탁되자 송 전 처장은 미련 없이 검찰을 떠났다. 변호사 등록은 아예 하지 않았다. 논산 양촌리로 내려갔다. 양촌리로 간 것은 밤나무 때문이었다. 73년 강경지청 검사 시절, 이곳 국유림 66만여 ㎡(약 20만 평)를 빌려 밤나무 1만여 그루를 심은 것이 인연의 시작이다. 낙향 직후 농산물 가공공장인 양촌 영농조합법인을 세웠다. 1년 뒤 법제처장으로 갔던 그는 98년 다시 돌아왔다. 이후 12년째 이곳에 ‘은둔’하며 살고 있다.

-이번 검사 스폰서 사건을 어떻게 보시나요.
“70~80년대 (검사들) 주머니에 돈이 있었나. (술 마신 걸) 모아 놓고선 누구 보고 갚으라고 그러기도 했지. 술 사고 밥 사고 하는 그 봉들 중에 괜찮은 사람들이 더러 있었어. 그 정도는 익스큐스(양해)가 된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세상이 달라졌어. 이제는 그것도 용서가 안 돼. 검찰에 남아 있던 나머지 폐습의 청산 과정인 것 같아.”
80년대까지만 해도 지방 유지들이 영감(검사)님들을 룸살롱 등에서 접대하는 일도 많았단다. 그러다 99년 ‘대전 법조비리’ 사건이 터지면서 전별금 관행이 문제가 됐다. 검찰 수사 이후 전별금은 추방해야 할 악습으로 낙인찍혔다.

송 전 처장은 “전별금은 나도 받아 쓴 적 있다”고 했다. “검사 되기 이전부터 관행이 존재했기 때문”라고 했다.

“대구에서 강경지청으로 전근(71년) 오면서 지방 유지들에게서 받은 전별금이 수십만원이었어. 검사 봉급이 4만원이었을 때였으니 서울에 320만원짜리 집을 사는 데 보탰지.”

-스폰서 사건이 터진 것은 시대적 흐름이라고 보나요.
“그렇지. 이건 총장의 지도력 문제가 아니라 검찰이 어떻게 살아왔느냐의 문제야. 속은 쓰리지만 잘못을 털어내고 다시 시작해야지. 검사는 명예를 지키되 굶고 사는 법을 배워야 해. 정제된 삶을 살아야지.”

1심에서 무죄가 난 한명숙 전 총리의 뇌물사건 수사에 대한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 사건을 보면서 저건 무죄가 나겠다고 생각했어. 돈을 줬다는 사람도 믿을 수 없거니와 물증을 압수한 것도 아니고 돈이 어디 갔는지 밝혀낸 것도 아니고…. 그때 한 검찰 간부에게 ‘이왕 잘못 기소한 것이면 공소를 취소하라’고 상부에 건의하라고 이야기했지.”

-검사 스폰서 파문과 한 전 총리 사건은 그래도 차이가 있지요.
“스폰서 사건은 누가 총장이든 막을 수 없는 것이지만 한 전 총리 사건은 막을 수 있는 것이지. 검사가 공명심을 가지면 수사가 엄정할 수 없는 거 아닌가. 누구나 엄(嚴)할 수는 있지만 정(正)하기는 쉽지 않아. 내가 서울지검장 때 기준을 세웠어. 검사가 직접 사람을 구속할 경우 반드시 나와의 면담을 거치라고 지시했어. 바르게 수사해 당당하고 꾸밈이 없는지, 공명심에 불타 당당하지 않은지를 가려내기 위해서지. 검사장이 전직 총리를 수사하라고 허가할 정도라면 구속사안은 돼야 해. 전 총리를 수사하면서 구속하지 못한 것이 검찰의 첫째 잘못이야.”

송 전 처장의 고향은 평안남도다. 서울지검 특수3부장·1부장을 거친 그는 90년 ‘범죄와의 전쟁’ 때 지휘 사령탑이었다. 범죄와의 전쟁이 끝나고 대전지검장으로 부임한 91년 오대양사건이 터져 죽을 고생을 했단다. 그 후 대검 중수부장으로 발탁됐고 ‘검찰의 꽃’으로 불리는 서울지검장 시절엔 슬롯머신 사건을 지휘했다.

“골치 아픈 벼슬살이를 많이 했어. 학연·지연 없는 이북 사람으로서 요직을 두루 거친 것은 드문 케이스였어. 나를 키워 준 건 경상도 사람이었어.”

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과는 악연이었다. 그는 부산지검 차장검사 시절 반체제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던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서에 세 번이나 결재했으나 세 번 모두 기각됐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을 구속시키려 했던 이유는 뭐였나요.
“그는 울산 지역에서 반체제 선동을 하고 돌아다녔어. 그러다 87년 2월 부산에서 열린 박종철 추모집회 현장에 있다가 붙들렸지. 반드시 구속해야 할 대상이었는데 나랑 친한 당직 판사가 행방불명이 되고 다른 판사가 영장을 기각했어. 내가 피고인과의 싸움에서 진 게 노 전 대통령 하나야. 운이 센 사람인 거지. 그의 운세가 꺾인 것이 박연차 사건이었지.”

양촌 영농조합법인은 밤 외에 딸기(양촌면이 전국 생산량의 7%를 차지, 단일면 최대)
를 가공해 잼 제조용 원료로 공급한다. 전체 종업원은 74명이고 조합 소유 땅은 1만6000㎡(약 5000평)이다. 평당 10만원씩 쳐 5억원가량 나간다. 공장 부지 등은 그의 소유지만 신분은 평조합원이다. 회사 운영은 밤나무 밭을 소개해 준 마을 이장의 아들이 맡고 있다. 그는 자기 재산을 지역 사회에 환원하는 방안을 강구 중이다.

“잘사는 집에 시집간 딸에게는 안 준다고 선언했어. 지역사람들에게 돌려줘야지. 지금은 60~70대 노인들의 일자리 창출에 기여하고 있지. 꼭지를 제거하는 딸기 한 박스당 1800원을 주는데 하루 20박스 하면 일당 3만6000원이야. 어떤 80대 할머니는 점심 도시락을 싸 갖고 와서 쉬지 않고 일하기도 해. 논산·익산 등지에서 차로 오는 사람을 합치면 평균 300명이 일해.”

송 전 처장은 미국에 사는 딸(미현)에게는 이미 ‘글’을 선물로 줬다. 96년 3월 교통사고로 숨진 아들의 49재에 부쳐 쓴 ‘고유문(告由文)’을 포함해 2005년 자신이 쓴 글들을 딸에게 보내는 편지체 형식으로 고친 뒤 소포로 부쳤다. 컴퓨터로 치지 않고 볼펜으로 꾹꾹 눌러 썼다. 신기하게도 20여일간의 작업을 마친 순간, 볼펜의 잉크도 딱 떨어졌단다. “부모의 육신의 형체가 없어진다 해도 글은 그 뜻과 내용이 쉽게 없어지지 않을 것이기에 돈보다 더 값진 선물”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지난해 1월 이 글들은 『‘밤나무 검사가 딸에게 쓴 인생연가』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됐다. 그의 집무실 책장 한쪽에는 검사 때 보직 명패가 진열돼 있다. 칸은 15칸인데 명패는 13개뿐이다. 맨 아래와 맨 위쪽 칸이 비어 있다. “(칸을 비워 놓은 것은) 벼슬을 더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아래 칸처럼) ‘자연인’으로 왔다가 (맨 위 칸의 빈 공간처럼) ‘대자유인’으로 돌아간다는 스스로의 다짐이야.” 수렁에 빠져 있는 대한민국 검찰에 그의 글과 말과 삶 자체의 울림이 ‘죽비’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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