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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를 최대한 칭찬하라, 그러면 그는 무너진다”

중앙선데이 2010.05.23 03:09 167호 16면 지면보기
‘매치플레이의 귀재’ 월터 헤이건(오른쪽)과 ‘골프의 성인’ 보비 존스(왼쪽). 1926년 플로리다에서 열린 72홀 매치플레이 맞대결 도중 36홀을 끝내고 찍은 사진이다. 헤이건이 12홀 차로 크게 이겼다. 헤이건은 프로, 존스는 아마추어였다. [AP=본사특약]
매치플레이로 뜨거운 한 주다. LPGA 투어에서는 우승상금이 4억원 가까운 사이베이스 매치플레이가, KLPGA에서는 우승상금 1억원인 두산 매치플레이가 열리고 있다. 매치플레이에는 이변이 많다. LPGA에서는 지난주 우승한 박세리가 1라운드에서 무명 신인에게 졌고, KLPGA의 지존 서희경도 2라운드에서 신인 이정민에게 패해 탈락했다.

치열한 심리전의 묘미, 골프 매치 플레이

타이거 우즈가 매치플레이에 강하다고 알려져 있다. 스튜어트 싱크는 2008년 액센추어 매치플레이 결승에서 우즈에게 8홀 차로 지고 나서 “우즈의 몸을 해부하면 볼트와 너트가 나올 골프 머신”이라며 무서워했다. 그러나 우즈도 종종 당한다. 자신 있었기 때문에 지난해 무릎 수술 후 복귀무대로 매치플레이를 택했지만 초반 나가떨어졌다.

골프에서 매치플레이의 전설은 월터 헤이건(미국·1892~1969)이 꼽힌다. 매치플레이에서 당대 최고 선수들이 다 그에게 무릎을 꿇었다. 처참하게 이기기도 했고, 아슬아슬하게 이기기도 했고, 벼랑 끝에서 살아나 연장에서 이긴 경우도 있다. 그는 매치플레이로 치러지던 PGA 챔피언십에서 1924년부터 27년까지 4연속 우승을 했다. 최고의 전과는 1926년 2월 28일과 3월 7일 36홀씩 총 72홀로 보비 존스와 치른 이벤트 게임이었다. 아마추어 정신을 지키기 위해(프로는 열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프로 전향을 하지 않은 존스와 프로의 권익 향상을 위해 총대를 멨던 헤이건의 경기라 상징성이 있었다. 존스는 하버드대를 나온 지성이었고, 헤이건은 한껏 멋을 내고 파티를 즐기는 플레이보이였다. 그는 프로야구팀인 필라델피아 내셔널스의 스프링 캠프에 초청될 정도로 만능 스포츠맨이었는데 스위치 히터일 뿐 아니라 스위치 피처이기도 했다.

국내 최강 서희경을 누른 루키 이정민.
당시까지 두 선수가 함께 경기한 6번의 US 오픈에서 상대 전적 5승1패로 앞선 존스가 우세할 거라는 시각이 많았다.

존스는 “올드 맨 파(Old Man Par)와 경기한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올드 맨 파’는 골프 코스를 말한다. 다른 선수가 아니라 변하지 않는 상대인 코스의 파를 깨기 위해 경기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해서 그랜드슬램을 이뤘다. 존스는 매치플레이에서도 스트로크 플레이와 똑같이 올드 맨 파를 상대로 경기해야 이길 수 있다고 깨달았다. 이후 9개의 매치를 연속 이겼다.

그때 만난 선수가 헤이건이었다. 헤이건은 당시 5년간 매치플레이에서 4패만을 기록했다. 경기 내용은 존스가 깔끔했다. 페어웨이와 그린에 공을 올리고 2퍼트를 했다. 그런데 끌려갔다.

24번째 홀에서다. 또다시 헤이건이 러프로 티샷을 날렸다. 나무가 시야를 가리고 있어 페이드샷을 쳐야 했다. 헤이건은 토핑을 냈다. 그런데 스핀이 강하게 걸린 볼은 벙커를 타 넘어 그린에 올라갔다. 존스의 공이 스티마이(공이 상대 퍼트라인을 막아 홀을 가리는 상황)가 됐는데 헤이건은 경사를 이용해 버디 퍼트를 우겨 넣었다. 경기의 분수령이 됐다. 파 3인 그 다음 홀에서 그린에 공을 올린 존스는 또다시 러프에 공을 쳐 박는 헤이건을 보고 “내가 저렇게 형편없는 샷을 치는 사람에게 4홀 차로 지고 있다는 것인가”라고 한탄했다. 골프 성인으로 불리는 존스는 그때부터 자신의 상대인 올드 맨 파를 잃고 헤이건이라는 심리전의 귀재와 싸워야 했다. 헤이건의 전략에 말려든 그는 이날 36홀에서 8홀 차로 졌고, 72홀 합쳐 12홀 차로 대패했다.

헤이건은 실력이 뛰어났지만 드라이브샷은 오락가락한 편이었다고 한다. 메이저대회 11승 중 절반에 가까운 5승을 매치플레이인 PGA 챔피언십에서 거둔 것은 그 때문이다. 드라이브샷이 러프로 갔을 경우 스트로크 경기에서는 만회할 수 없는 큰 피해를 볼 수 있지만 매치플레이에서는 그냥 한 홀만 잃으면 되기 때문이다. 큰 부담 없이 공격적인 경기를 할 수 있기 때문에 러프에서도 신출귀몰한 샷이 나왔다.

경기 후 존스는 “드라이브샷을 똑바로 치고 두 번째 샷을 그린에 올려 2퍼트로 파를 하는 사람과 경기하는 게 편하다. 나보다 더 가깝게 핀에 붙여 버디 퍼트를 넣는다면 인정하겠다. 그런데 상대가 드라이브샷을 실수하고 두 번째 샷도 형편 없었는데 버디로 홀아웃한다면 나는 화가 난다”고 말했다.

드라이브를 잘 못 친 선수가 버디를 한다면 상대는 속이 끓는다. 그러나 드라이브샷을 잘 못 치고도 버디를 한다는 것은 이유가 있다. 헤이건은 이날 36홀에서 53퍼트를 했고 존스는 62퍼트를 했다. 퍼트 수가 적은 것은 아이언이 정교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최경주는 “드라이브샷을 잘 치는 사람이 아니라 아이언샷을 잘 치는 선수가 무섭다”고 했다. 초대 오픈 챔피언 윌리 파크는 “퍼트를 잘하면 누구와도 상대할 수 있다”고 했다. 헤이건은 아이언이 날카로웠고 당대 최고의 퍼터였다.

헤이건은 쇼맨십이 강하며 심리전에도 능했다. “골퍼가 안됐다면 훌륭한 배우가 됐을 것”이라고 당대 희곡작가이자 배우인 패터슨 맥넛은 말했다. 쇼맨십을 갤러리뿐 아니라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썼다.

이런 일화도 있다. 헤이건이 연습라운드에서 그린 앞 벙커에 들어갔다. 평범하게 샷을 해 핀 옆에 붙였다. 똑같은 상황이 며칠 후 실제 경기에서 일어났다. 매우 힘든 샷인 양 클럽을 몇 차례 바꿨다. 결국 그는 연습라운드에 쳤던 클럽으로 똑같은 샷을 해 다시 핀 옆에 붙였다. 관중은 기적이 일어난 것처럼 함성을 질렀다. 그는 자신을 아주 운이 좋은 선수로 보이게 했다. 상대의 고통은 더 커진다.

그는 비정한 전략가였다. 헤이건은 “상대의 성격이 어떤지 항상 파악했다”고 말했다. 폴 런연은 “그는 룰에 어긋나지 않기만 하면 이기기 위해 어떤 일도 했다”고 말했다. 진 사라센은 “그의 전략 중 하나는 친절로 상대를 죽이는 것이다. 가식이지만 꿰뚫어 보기가 불가능하다. 젊은 선수의 기세가 좋으면 샷을 칭찬하면서 ‘이 대회에서 우승하면 나와 함께 같이 투어를 다니자’는 둥 친절을 보이면서 마음을 열게 한다. 마음 약하게 해 놓고 자신의 경기를 한다. 투어에 같이 다니는 건 당연히 없던 일이 된다.”

24년 PGA 챔피언십 4강전에서다. 상대인 레드 디어는 컨디션이 좋았고 헤이건이라는 거물에게 져도 잃을 게 없다고 생각했다. 헤이건은 상대의 샷을 칭찬하면서 “여기가 우리 동네인데 내가 대패하면 지역신문들이 날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디어는 첫 홀에서 버디를 했지만 쫓기는 자의 입장이 됐다. 긴장한 그는 헤이건에게 8홀 차로 졌다.

25년 PGA 챔피언십 8강전에서다. 연장에서 1.2m 버디 퍼트를 성공한 헤이건은 1m가 약간 안 되는 상대에 컨시드를 줬다. 헤이건이 이날 이 거리에서 한 번도 컨시드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상대인 레오 디젤은 매우 당황했다. 그는 퍼트 준비에 온 신경을 쓰고 있다가 갑자기 다음 홀로 가 드라이브샷을 하는 바람에 토핑을 내면서 졌다. 이듬해 PGA 챔피언십 결승에서 5홀 차로 앞서다가 결국 5홀 차로 헤이건에게 패한 디젤은 경기 후 동료에게 “그는 나를 죽이는 것 같다. 다시 그와 경기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경기에서는 잔인했지만 인생을 즐겼다. “서두르지 마라, 걱정하지 마라. 꽃 향기를 맡을 수 있는 짧은 시간 이곳에 있는 것일 뿐”이라고 했다. 그는 “백만장자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백만장자처럼 살고 싶다”고 했고 “인생을 즐기기 위해서는 챔피언 트로피가 필요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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