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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무 “투톱은 비능률” …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

중앙선데이 2010.05.23 03:04 167호 16면 지면보기
“끝이 좋으면 모두 좋다(All’s well that ends well).”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극 제목이다. 국제축구연맹(FIFA)은 지난달 이 제목과 함께 안정환(34·다롄 스더)과 이동국(31·전북 현대)의 축구 인생을 기사로 다뤘다. FIFA는 다사다난한 선수 생활을 보낸 두 선수가 남아공 월드컵에서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을지 주목했다. 2010 남아공 월드컵은 항상 운명이 엇갈려온 비운의 킬러 안정환과 이동국이 처음으로 함께 나서는 대회다. 물론 두 선수가 최종 엔트리까지 살아남는다는 것을 전제로 한 얘기다. 엇갈리기만 했던 이들이 과연 남아공에서 상생할 수 있을까.

안정환과 이동국, 두 올드 보이의 남아공 월드컵 운세

 
막노동하며 잔뼈 굵은 안정환
안정환은 살 집이 없어 이모집에 얹혀 살던 대림초등 시절 ‘빵과 우유’를 먹을 수 있다는 이유로 축구를 시작했다. 축구를 끝낸 뒤에는 허기를 달래기 위해 한강 둔치를 찾았다. 굿판을 벌인 뒤 남은 음식들로 허기를 채우기 위해서였다. 서울공고 시절에는 축구부 훈련이 끝나면 아르바이트로 용돈을 벌었다. 지하철 5호선 목동역 공사장에서도 일했던 그는 “목동역을 이용하는 분들은 내게 고마워해야 한다. 죽을 뻔했던 위기를 겪으면서 열심히 일했다”고 회고했다. 신길동 나이트클럽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덕분에 그는 지금도 과일 깎는 솜씨가 수준급이다. 아주대 시절에도 후배 송정현(전남)과 함께 시간이 날 때마다 막일을 나가야 했던 그는 프로에 데뷔해서야 비로소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동국은 어렸을 때부터 포항의 자랑이자 스타였다. 포철동초등 시절 차범근 축구상을 받으며 두각을 나타냈고, 포철공고 때는 고교무대를 평정하며 황선홍의 뒤를 이을 대형 스트라이커로 일찌감치 주목을 받았다.

이들은 1998년 나란히 K-리그에 데뷔했고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당시 부산과 포항에서 뛰던 안정환과 이동국은 경기당 1만 명의 고정 팬을 끌고 다니는 블루칩이었다. 특히 골문 앞에서 수비수들을 부수며 묵직한 골을 만들어내는 ‘타깃형 킬러’ 이동국과 화려한 기술과 반박자 빠른 슛을 보유한 ‘테크니션’ 안정환이 결합한 공격력이라면 아시아는 물론, 세계에도 뒤지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게 했다. 2000년 4월 26일 잠실 주경기장에서 벌어진 한·일전에서 일본은 에이스 나카타 히데토시를 내세우고도 한국에 0-1로 패했다. 현장에서 취재하던 일본의 저명한 축구 저널리스트는 “안정환과 이동국이 뛰지 않았는데도 우리는 졌다. 이들이 가세한다면 일본은 앞으로 10년간 한국에 승리하기 힘들 것 같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98 프랑스 월드컵서 샛별로 뜬 이동국
운명의 장난처럼 이들의 희비는 항상 엇갈렸다. 98 프랑스 월드컵이 시작이었다. 안정환은 1997년 4월 한·중 정기전에서 이동국보다 먼저 A매치에 데뷔했지만 차범근 감독의 신임을 얻지 못했다. 반면 포철공고를 졸업한 후 98년 K-리그에 데뷔한 이동국은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 깜짝 발탁되는 행운을 누렸다. 이동국은 0-5로 참패한 네덜란드전에서 인상적인 중거리슛을 선보였다. 그는 프랑스 월드컵에서 거둔 유일한 수확이라는 호평을 받으며 우량주로 무럭무럭 자랐다.

2002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이들은 다시 다른 길을 걸었다. 이동국은 거스 히딩크 감독의 최종 엔트리에서 제외된 반면 안정환은 미국전 동점골에 이어 이탈리아와 16강전 골든골로 일약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했다. 하지만 유럽에서 명성을 이을 것이라던 안정환은 메스(프랑스)·뒤스부르크(독일)에서 기회를 얻지 못하고 헤매야만 했다. 반면 광주 상무에 입단한 이동국은 부활의 기지개를 켜며 대표팀의 주축으로 발돋움했다.

독일 월드컵이 벌어지던 2006년 이들의 운명은 다시 소용돌이친다. 이동국은 월드컵을 40여 일 앞두고 오른 무릎 십자인대가 끊어지며 본선행이 좌절됐다. 대표팀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안정환이 다시 월드컵 대표로 나서 토고전 역전골을 뽑아내며 기지개를 켰다.

이후 안정환과 이동국은 동반 추락했다. 안정환은 수원에서 빛을 보지 못했고, 이동국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미들즈브러에서 방출되는 수모를 겪었다. 그리고 2009년 이들은 희망의 나래를 함께 펴기 시작했다. 중국 수퍼리그 다롄 스더에 입단한 안정환은 6골·2도움(팀 내 득점 1위)으로 존재감을 알렸고, 이동국은 K-리그에서 21골을 뽑으며 득점왕에 오른 데다 전북을 창단 첫 정규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안정환과 이동국은 대표팀에서 투톱 공격수로 나설 때면 ‘생각의 호흡’을 맞추지 못했고, 화학적으로 융화되지 못했다. 히딩크 감독이 부임하던 2002년 3월 튀니지와 원정 평가전에서 처음으로 호흡을 맞춘 이들은 졸전을 펼쳤다. 움베르투 코엘류 감독은 2003년 4월 한·일전에 이들을 내세웠지만 0-1로 패했다. 후임 조 본프레러 감독은 2004 아시안컵에서 ‘선발 이동국-조커 안정환’ 카드로 재미를 봤지만 2004년 9월 베트남전에서 졸전을 펼치자 폐기했다. 독일 월드컵 때 지휘봉을 잡은 딕 아드보카트 감독과 후임 핌 베어벡 등 외국인 감독들은 이들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이들을 나란히 발탁한 허정무 감독은 어떤 생각일까. 그는 3월 3일 열린 코트디부아르전을 위해 영국 런던으로 떠나기 전 인천공항에서 “이동국과 안정환이 투톱으로 함께 나서는 것은 효과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한다”고 잘라 말했다. 코트디부아르전에서 이동국은 선발로 나서 결승골을 터뜨렸고, 안정환은 후반 이동국을 대신해서 투입돼 활발하게 공간을 열었다. 허 감독은 이동국을 선발 요원, 안정환은 히든카드로 생각하고 있다. 경기 흐름을 바꿀 만한 기술 때문에 ‘변속기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안정환은 월드컵 통산 3골(아시아 최다)을 뽑았고, 그중 2골이 역전골이었다.

평소 절친한 사이면서도 대표팀에서 함께 행복했던 추억이 없는 이들에게 남아공 월드컵은 마지막 기회다. 안정환은 “동국이와 함께 뛴다면 골을 넣을 수 있도록 돕고 싶다”고 말했다. 16일 에콰도르와 평가전에서 이동국이 오른 허벅지 뒷근육이 찢어지자 안정환은 “나도 허벅지 근육이 1㎝ 이상 찢어진 적이 있는데 크게 걱정할 것 없다”고 말했다.

이동국은 “언론에서 형과 나를 자꾸 경쟁 분위기로 몰아가는데 그렇게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결국 골로 말하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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