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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디스 · S&P · 피치 독과점 체제 해체 시작 100년 수퍼파워 끝나나

중앙선데이 2010.05.23 03:00 167호 24면 지면보기
“세계에는 수퍼파워 두 개가 있다. 하나는 미국이고 다른 하나는 무디스다.”
미국 뉴욕타임스(NYT) 칼럼니스트인 토머스 프리드먼이 아시아 금융위기 한 해 전인 1996년 한 말이다. 그가 말한 ‘무디스’는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피치 등 세계 3대 신용평가회사들(빅3)의 대명사다.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 나라에 대해 미국은 스마트 폭탄을 떨어뜨리고, 그들은 신용등급을 강등시킨다. 방법은 다르지만 결과는 같다. 파멸!”이라고 말했다.

창사 이래 최대 위기, 3대 신용평가사


그의 말대로 97년 무디스 등이 태국과 한국 등의 신용등급을 연거푸 깎아내렸다. 1차 걸프전 때 미 스마트폭탄 세례를 받은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처럼 한국 등의 경제상황은 쑥대밭이 됐다. 수퍼파워 최전성기에 그 위력을 톡톡히 실감한 셈이다.
프리드먼의 주장 이후 14년이 흘렀다. 2010년 5월 현재 신용평가사들에 대한 불만이 세계 곳곳에서 일고 있다.

“3대 신용평가사들은 한밤중의 뱀파이어처럼 우리의 피를 소진시킬 것이다.”
세계 최대 채권펀드인 핌코의 수석 펀드매니저 짐 로저스는 이렇게 일갈했다. 최근 뉴욕에서 열린 투자 콘퍼런스에서 그는 “신용평가회사들이 (기업이나 투자자에게) 도움은 되지 않고 흡혈귀처럼 달라붙어 지내는 존재”라고 덧붙였다. 로저스는 신용평가를 받아야 하는 기업이나 정부 쪽 사람이 아니다. 신용평가회사들이 시어머니처럼 구는 것을 못마땅해 하는 쪽도 아니다. 그는 신용평가회사들의 고객이다. 이들이 내린 평가의견을 바탕으로 국가나 기업 채권에 돈을 투자하는 쪽이다. 그의 비판은 빅3에 대한 시장의 불신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게 해준다.
 
빅3 CEO들은 마지막 황제?
로저스만 빅3를 공격하는 게 아니다. 미국 상원은 지난달 25일 신용평가 빅3 최고경영자(CEO)들을 의사당으로 불러들였다. 무디스의 레이먼드 맥대니얼(52), S&P의 데번 샤르마(53), 피치의 스티브 조인트(51)를 증언대에 세웠다. 마치 비밀스러운 화원의 문이 열리는 듯했다. 대중 앞에 모습을 좀체 드러내지 않았던 그들이 생중계되는 청문회에 섰기 때문이다. 그들은 암호 같은 AAA나 BBB 등의 부호(신용등급)를 움직여 글로벌 금융시장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알 프랭큰 상원의원은 “신사 여러분은 무디스·S&P·피치가 뱀파이어로 불리는 것을 혹시 아는가?”라고 물었다. 그들은 얼버무렸다. 무디스의 맥대니얼은 “알고는 있지만 우리의 활동을 부적절하게…”라고 말끝을 흐렸다. 이후 쏟아진 질문들은 ‘100% 빅3를 공격하는 내용이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보도했다. 의회 청문회에서 으레 있기 마련인 그들을 감싸고 도는 의원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다.

세 사람은 잘못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무디스 맥대니얼은 “돌이켜보니 우리가 신용을 평가할 때 디딤돌로 삼은 중요한 전제들이 잘못된 듯하다”고 고백했다. 그의 입에선 주로 무디스를 변호하는 말들이 나왔지만, 그의 실토는 놀라운 변화였다. 맥대니얼은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를 확산시킨 부채담보부증권(CDO) 등에 등급을 매기는 전문가였다. 그는 우량과 부실 모기지대출을 섞어 첨단금융 기법으로 리스크를 분산시켰기 때문에 부도위험이 거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었다. 그가 이런 전제가 잘못됐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가 2005년 무디스 CEO가 되는 데 밑바탕이 된 업적을 스스로 부정한 꼴이었다.

2위 신용평가회사인 S&P의 인도 출신 샤르마는 전략 컨설턴트 출신답게 “전임자인 캐슬린 코벳의 임기 동안 발생한 일에 대해서는 언급하는 게 적절하지 않다”고 말했다. 서브프라임 사태와 관련된 모든 책임을 전임자에게 돌리며 의원들의 공세를 피했다. 샤르마는 2007년 코벳의 뒤를 이어 S&P CEO가 됐다.

빅3 가운데 위상이 가장 낮은 피치의 조인트는 “금융시장의 투명성을 높이는 데 피치가 최선을 다했다”고 말했다. 세 사람 가운데 가장 적극적으로 회사 입장을 방어했다. 그가 2000년 합병을 거쳐 현재 피치그룹을 일궜기 때문이다.

세 사람의 증언 이후 사태는 급박하게 돌아갔다. “세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잔혹한 일이 벌어졌다”고 NYT가 묘사할 정도였다. 미 상원이 무디스 직원 e-메일을 공개했다. 무디스와 월가 투자은행이 신용등급을 놓고 야합한 사실이 드러났다. 지난주 말 미 상원은 증권거래위원회(SEC) 산하에 채권평가위원회를 설치해 신용평가회사들을 감독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앞으로 위원회는 신용평가회사들을 교대로 지정해 자산담보부증권(ABS) 등급을 매기도록 한다. 빅3 독식 체제가 끝나는 셈이다. 또 위원회는 신용평가회사들이 신용을 제대로 평가했는지 조사한다.

유럽연합(EU)은 부채위기 와중에 빅3가 신용등급을 강등해 사태를 악화시킨 데 화가 나 역내 신용평가회사를 설립하는 계획을 내놓았다.

무디스 주가 22달러로 급락
무디스는 빅3 가운데 유일하게 상장돼 있다. 최대 주주가 ‘투자의 귀재’인 워런 버핏이다. 무디스 주가<그래프>가 신용평가 빅3의 풍향계 구실을 하는 이유다. 최근 버핏은 무디스 지분 가운데 3분의 1을 처분했다. 버핏은 이렇다 할 이유를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시장은 그의 지분 축소를 빅3에 대한 평가로 받아들였다. 법 개정 등으로 빅3가 누려온 과점 체제가 흔들리면 수익성이 떨어질 것으로 보고 버핏이 지분을 정리한 것으로 풀이했다.

프랭크 파트노이 미 샌디에이고대 교수(증권법)는 최근 로이터통신과 인터뷰하면서 “현재 빅3가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맥대니얼·샤르마·조인트는 빅3 전성기를 마감하는 인물이 될 수도 있다.

빅3 전성기는 75년에 시작됐다. 이전까지 그들은 신용등급을 매겨 돈을 받고 투자자들에게 팔았지만 영향력이 보잘것없었다. 하지만 그해 미 SEC가 투자은행·증권사의 안전성을 평가하기 시작했다. 1차 오일쇼크가 야기한 금융위기 대응이었다. SEC는 ‘전국적으로 알려진 신용평가회사(NRSRO)’한테서 투자적격 등급(BBB- 이상)을 받은 채권은 위험도를 낮게 매긴다는 규정을 만들었다. 이런 채권을 보유한 투자은행 등의 안정성이 상대적으로 높아지는 셈이다. 투자은행들이 채권 인수에 나서면서 발행 기업들에 신용평가를 받도록 요구했다. 더욱이 SEC가 수많은 신용평가회사 가운데 딱 3곳, 즉 무디스·S&P·피치에만 NRSRO 지위를 부여했다. 빅3 과점 체제가 시작됐다. 신용평가 수요가 급증했고 빅3의 곳간도 풍성해졌다.

파트노이 교수는 저서 『전염성 탐욕』에서 “빅3는 SEC가 이후 NRSRO 자격을 다른 회사에 부여하려고 하면 필사적으로 로비해 막았다”고 말했다. 빅3는 80년대 초 SEC를 움직여 뮤추얼펀드 등이 투자적격 이상 채권을 사들이면 리스크를 낮게 평가하는 기준도 만들도록 했다. 막 투자 세계의 큰손으로 부상하던 기관 투자가들을 활용해 수익기반을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한 셈이다.
 
美 금융시장서도 애물단지
90년대 들어 빅3의 영향력은 글로벌화했다. 미국 투자은행들이 세계 기업들의 주식과 채권을 인수해 미국 뮤추얼펀드 등에 팔면서 빅3 신용등급은 세계 기업들이 이수해야 할 시험이 됐다. 영국 석유회사 BP도, 독일 자동차 회사 폴크스바겐도, 스웨덴 이동전화 단말기 제조업체인 에릭슨도 미국 빅3의 평가를 받아야 미 뮤추얼펀드를 겨냥해 채권을 발행할 수 있었다. 각국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북유럽 아이슬란드에서 남미 칠레까지 거의 모든 나라가 빅3 평가표를 첨부해야 국채를 글로벌 시장에 내놓을 수 있었다.

빅3는 완전무결한 존재로 여겨졌다. 미 사법부는 언론출판의 자유를 보장한 수정헌법 1조를 들어 빅3에 면죄부를 발급했다. 신용평가를 의견표현으로 분류해 자유를 최대한 인정했다. 판단을 투자자의 몫으로 돌려놓았다. 이후 빅3는 엉터리로 신용을 평가한 것이 드러나도 소송에 시달리지 않았다.

아시아 금융위기 직후 한국 등이 “위기 순간 등급을 떨어뜨려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고 반발했다. 하지만 미국 의회나 SEC 등은 위기에 빠진 나라들이 늘 하는 불평이라며 귓등으로 흘렸다. 또 ‘신용평가회사들이 사전 경고 기능을 전혀 하지 못했다’는 투자자들의 비판에 대해서는 ‘인간이 하는 일은 불완전하다’며 무시했다.
미 에너지 기업인 엔론 파산 직후 투자자들의 원성을 등에 업은 몇몇 미 의원들이 법 개정을 추진했다. 5년 동안 지루한 공방 끝에 그들은 ‘전국적으로 알려진 신용평가회사(NRSRO)’를 3곳에서 10곳으로 늘리는 데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빅3가 75년 이후 30년에 걸쳐 아성을 구축해 놓았기에 새로 NRSRO 반열에 오른 회사들은 맥을 추지 못했다.

그러나 빅3 아성은 예상치 않은 곳에서 흔들리고 있다. 그들의 텃밭인 바로 미 금융시장에서였다. 빅3가 전성기를 만끽하던 90년대 중반 신용디폴트스와프(CDS)가 개발됐다. 이는 채권이 부도났을 때를 대비한 일종의 보험이다. 보험료(프리미엄)가 시시각각 변하면서 기업이나 정부의 신용도가 마치 주가처럼 시장에서 평가됐다. CDS 프리미엄이 단기 급등락하는 게 적잖은 문제지만 빅3의 뒷북 평가에 염증이 난 시장은 CDS를 반겼다. 뮤추얼펀드 등이 빅3의 평가를 기다리지 않고 CDS 프리미엄 움직임을 보고 대응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런 와중에 미국과 유럽 정부가 법규 개정 등으로 빅3 과점 체제를 해체하기 시작한 것이다. 빅3 CEO들은 서둘러 돌파구를 찾아야 할 처지다. 그러나 어디에도 쉽고 편한 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S&P의 CEO 샤르마는 최근 워싱턴포스트(WP)와 인터뷰에서 “현재 우리는 엔론의 분식회계를 문제 삼지 못한 회계법인 아서앤더슨처럼 심각한 신뢰 위기를 겪고 있다”고 말했다. 아서앤더슨은 신뢰 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공중분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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