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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항 반발세력 약탈·방화 … 방콕 도심 게릴라전 양상

중앙일보 2010.05.20 01:44 종합 14면 지면보기
태국 반정부 시위대의 방화로 19일 방콕 도심 곳곳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고 있다. 두 달 넘게 도심 점거시위를 했던 시위대 지도부는 이날 집단 투항을 결정했지만, 일부 시위대는 도시 곳곳에서 약탈과 방화를 저질렀다. 태국 정부는 증권거래소·쇼핑센터 등 20여 곳이 불탔다고 발표했다. [방콕 AFP=연합뉴스]
방콕=정용환 특파원
19일 오후 1시15분(현지시간) 태국 방콕의 쇼핑중심가인 라차프라송 거리. 반정부 시위대가 무단 점거해온 지역이다. 진압군이 총격전을 벌이며 시위대를 몰아붙였다. 시위대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인 자투폰 프롬판이 거리에 설치된 연단에 올랐다. 연단 아래에선 레드 셔츠를 입은 시위 참여자들의 흐느끼는 소리가 번졌다. 아랫입술을 깨물고 마이크를 잡은 자투폰이 입을 열었다. “우리는 누구 한 사람도 포기할 수 없다. 죽어가는 우리의 형제들이 너무 많다. 더 이상의 희생을 막아야 한다.” 다른 지도자인 나타웃 사이쿠아는 “야만적인 살상을 참을 수 없다”며 “훗날 다시 싸우기 위해 지금은 힘을 모아야 할 때”라고 말했다. 시위대 지도부 7명은 이어 라차프라송 거리 인근 라마 1세가(街)의 로열타이 경찰본부로 자진 출두했다. 두 달 넘게 끌어오던 반정부 시위 사태가 일단락되는 순간이었다.


정용환 특파원 태국 시위현장 가다



◆곳곳에서 교전, 전쟁터 방불=이날 오전 3시30분 라차프라송 거리 남쪽 살라댕로(路). 수십 대의 병력 수송 차량에서 M16 소총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쏟아져 나왔다. 두 시간 뒤엔 40여 대의 장갑차가 라차프라송 거리와 남쪽 룸피니 공원 일대에 배치됐다.



13일부터 시위대 점거지역을 외곽에서 봉쇄하고 있는 군 당국은 확성기로 “곧 진압작전이 시작된다. 지역 주민들과 외국인은 즉시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라”고 방송했다.



본격적인 진압 작전은 오전 6시 방콕 동부 딘댕 삼거리에서 시작됐다. 지난 엿새 동안 반정부 시위대와 군경의 총격전이 치열했던 딘댕 지역 상공에선 경찰 헬기가 돌면서 “투항하지 않으면 사살하겠다”며 해산을 종용했다.



같은 시간 룸피니 공원 일대에서도 장갑차가 죽창·폐타이어로 쌓은 시위대의 바리케이드를 뚫고 봉쇄 구간 안으로 진입했다. 양측의 가장 큰 교전은 라차프라송 동쪽 위타유로(路)에서 벌어졌다. 미국·뉴질랜드·일본 대사관 등 10여 개 대사관이 밀집한 이곳에서 총격전이 벌어져 일부 대사관 건물에 총탄이 날아들기도 했다. 이날 라차프라송 봉쇄 구역과 본카이·딘댕 삼거리에서 벌어진 교전으로 6명이 사망하고 50여 명이 부상했다고 현지 언론은 전했다. 이탈리아 사진기자 파비오 폴렌기(45)도 총탄에 맞아 현장에서 숨졌다.



◆방콕 시내 20여 곳서 불길=진압은 끝났지만 혼란은 더 커졌다. 방콕의 부심권인 라프라오·라마4세 거리 등 시위대 점거 지역과 떨어진 여러 곳에서 총성과 폭발음이 나는 등 방콕 전체가 공포에 휩싸였다. 태국 정부는 이날 방콕 시내 20여곳서 시위대의 방화가 있었다고 밝혔다. 태국 경제의 상징인 증권거래소 건물도 공격을 받아 불탔다. 거래소 측은 20~21일 이틀간 문을 닫겠다고 밝혔다. 언론사도 성난 시위대의 표적이 됐다. 국영 채널3 방송국이 불에 타 오후 3시30분부터 방송 송출이 중단됐다. 방송국 측은 직원들을 긴급 대피시켰다.



봉쇄됐던 라차프라송 거리에 있던 백화점들도 피해를 봤다. 동남아시아에서 둘째로 큰 쇼핑몰 센트럴월드는 시위대의 화염병 공격을 받았고, 인근의 또 다른 고급 쇼핑몰 시암파라곤 센터도 화염에 휩싸였다.



탁신 친나왓 전 총리 지지 정서가 강한 콘깬·우돈타니 주 등 북동부 지역에서는 시위대가 관공서에 난입했다. 태국 정부는 방콕과 북동부 지역 등 23개 주에 이날 오후 8시부터 20일 오전 6시까지 통행금지를 선포했다.



◆아피싯의 강공책=아피싯 웨차치와 총리는 방콕의 상업 중심지를 점거한 시위대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입장을 누차 밝혀왔다. 협상 가능성을 열어두면서도 강공책의 필요성을 강조해왔다. 하지만 정치적인 해결을 주장하는 군 실세 아누퐁 파오친다 육군 참모총장과의 이견으로 강경진압에 바로 나서지는 못했다.



시위대의 무장 투쟁을 지휘하던 카티야 사와스디폴이 불의의 피격으로 숨지면서 시위대 강경파의 입지도 크게 줄어들었다. 이로 인해 ‘결사 항전’의 목소리보다는 현실적인 협상파들의 주장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시위대 지도자 나타웃이 정부 측에 전화로 협상을 타진했고 상원의 중재 제안을 즉각 수용하는 등 기세가 많이 수그러진 모습을 보였다. 강제 진압을 반대하던 군 수뇌부조차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며 즉각 작전에 나섰다는 분석이다.



정용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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