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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동북아 ‘오일허브’의 꿈이 익는다

중앙일보 2010.05.20 00:24 경제 2면 지면보기
30년에 걸친 대역사에 마침표가 찍혔다. 650만 배럴의 기름을 담을 수 있는 울산 지하 비축기지가 19일 준공된 것이다. 1980년 시작된 정부의 석유비축사업은 도중에 두 차례 계획을 바꾼 끝에 9개 기지에 1억4600만 배럴(90일분)을 저장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게 됐다. 한국석유공사는 그동안 쌓인 건설과 운영 노하우, 비축 가능 물량을 바탕으로 동북아 석유거래의 중심지인 ‘오일허브’로의 도약을 준비 중이다.


울산기지 완공에 이어 UAE 물류기지도 추진
지형·입지 좋고 석유공사 비축 노하우도

여기에 반가운 우군이 나타났다. 아랍에미리트(UAE)가 한국에 석유 물류기지를 만들고 싶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우리 정부도 적극적으로 이에 응하고 있다. 중동의 대표적 산유국인 UAE의 기름이 한국을 중심으로 거래된다면 우리나라를 싱가포르 같은 오일허브로 만든다는 정부 구상에 가속도가 붙을 전망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19일 울산 석유비축기지 준공식을 마 친 뒤 기지를 둘러보고 있다. 오른쪽부터 박순자 한나라당 최고위원, 이 대통령, 김기현 한나라당 의원. [조문규 기자]
◆산유국 물류기지로=UAE가 이런 제안을 해온 것은 세계 석유 소비시장의 변화 조짐에 미리 대응하려는 취지에서다. 전통적으로 석유를 많이 사다 쓰는 미국과 유럽은 석유 소비 둔화세가 뚜렷하다. 경제가 침체한 데다 가능하면 친환경 에너지를 쓰는 쪽으로 산업구조를 개편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동북아는 여전히 성장하는 시장이다. 이런 소비처 가까이에 물류기지가 있으면 여러모로 편리하다. 갑작스럽게 수요가 늘면 멀리 중동에서 직접 실어오지 않고 한국에서 보관 중인 물량으로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당장의 물류비를 아낄 수 있다. 또 국제가격이 떨어지면 석유를 기지에 보관했다 값이 오를 때 내다팔 수도 있다. 이렇게 하면 산유국으로선 원유생산량을 줄이지 않고도 판매수익을 유지할 수 있다.



중앙아시아 유전에서 뽑아낸 기름이 송유관을 타고 동해까지 오게 하는 계획이 구상되고 있는 점도 중동 산유국을 자극한 것으로 보인다. 석유공사 강남의 석유비축처장은 “중앙아시아산 기름을 미국으로 실어 나르는 물길을 동해에서 시작하면 물류비가 배럴당 1~2달러가량 낮아져 가격경쟁력을 갖게 된다”고 설명했다.



◆운용능력·지형에서 유리=동북아 3개국 가운데 한국이 물류기지 후보로 떠오른 것은 그만큼 좋은 조건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해안에는 지하기지를 건설하는 데 필수적인 단단한 암반지형이 많다. 또 한국의 항구는 수심이 깊다. 암반지형이 부족한 일본이나 항구가 얕은 중국에 비해 지형적으로 우월한 셈이다.



더 중요한 것은 기지 운용능력이다. 보통 국가비축유는 비상시가 아니면 잘 꺼내 쓰지 않는다. 탱크에 기름을 쟁여넣고, 이를 유지·보관하는 데 상당한 비용이 들어간다. 이 돈은 모두 국가가 부담한다.



하지만 한국은 10년 전부터 이런 관행을 뜯어고쳤다. 외환위기가 계기였다. 정부가 공기업에도 허리띠를 졸라매라고 요구하자 살길을 찾아나선 것이다.



석유공사는 고심 끝에 기름을 단순히 담아두지 않고, 빌려주고 선물거래에 활용하는 ‘동적비축’ 개념을 도입했다. 국내 수요처뿐 아니라 산유국이나 석유 메이저에도 빌려주는 ‘국제 공동비축사업’도 벌이고 있다. 석유공사는 이 사업으로 지난해에만 1670억원을 벌어들였다.



그런데 이게 말처럼 쉽지 않다. 시장의 가격동향을 정확히 예측하는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 기름을 옮기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줄어드는 양을 최소화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이다. 국가 비축유로 이런 사업을 한 것은 한국이 처음이다. 석유공사 백문현 비축사업본부장은 “단순히 보관만 하는 것과 이를 자주 꺼내고 채워넣는 것은 전혀 다른 운용방식”이라며 “동적비축 운용 노하우는 석유가 자주 들락거리는 상업거래에도 쉽게 적용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동북아 오일허브 촉매=한국 입장에서도 UAE의 제안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정부는 이미 2020년까지 동북아 오일허브를 만든다는 계획을 세운 상태다. 울산과 여수에 4000만 배럴 가까운 규모의 상업용 저장기지를 만들고, 대형 유조선을 여러 척 댈 수 있는 항구를 덧붙일 계획이다.



국가 비축시설 가운데 이미 외국에 빌려주는 3865만 배럴의 공간도 있다. 오일허브 역할을 하는 싱가포르의 저장능력이 6000만 배럴인 점을 고려할 때 만만치 않은 물량이다.



하지만 저장시설과 운용 노하우가 있다고 쉽게 오일허브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 거래가 활발하게 일어나야 한다. 그래야 수요자와 공급자가 함께 몰려들고, 자연스럽게 금융기능도 결합되기 때문이다. 거래가 활성화되는 단계에선 특히 국제 금융기능이 함께 뒷받침해줄 필요가 있다.



익명을 원한 지식경제부 관계자는 “싱가포르도 중동에서 가깝다는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거래 중심지 단계를 거쳐 아시아의 오일허브로 성장했다”며 “대표적인 중동 산유국인 UAE가 한국에 비축기지를 마련해 거래를 시작하면 동북아 오일허브 계획에 한층 탄력이 붙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글=최현철 기자

사진=조문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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