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삶의 향기]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중앙일보 2010.05.20 00:10 종합 33면 지면보기
할머니는 어린 내가 미덥지 못했다. 냇가에 고기 잡으러 간다면 “고기가 너를 잡겠다”했고, 고기를 잡아오면 “그놈 눈이 먼 모양이다” 했다. 나는 질세라 “요놈들 눈 깜박거리는 소리에 귀청 떨어지겠소!”하고 대들었다. 그러면 언제나처럼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하고 있네!”로 일축했다.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어린 시절 내내 귀에 딱지가 앉게 들은 세상에서 가장 궁금한 소리였다. 어디선가 머리 푼 귀신이 씻나락을 튀밥처럼 바삭바삭 씹고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보리가 익어가던 어느 날부터는 세상에서 가장 얼얼한 소리가 되었다. 할머니가 풋보리를 불에 거슬려 비벼주던 밤이었다. 나는 보리알을 깨물며 옛날이야기 적어오기 숙제를 하겠다고 이야기를 졸랐다. 공주, 왕자, 백마가 나오는 이야기는 애당초 기대하지도 않았다. 제발 “옛날 어떤 놈이 있었더란다”로 시작되지 않기를 바랐다. 그랬더니 그날은 “옛날 어떤 년이 있었더란다”로 시작했다.



“보리 흉년에 구휼이 났더란다. 죽을 끓여 먹이는데, 사방에서 살라고 몰려 온 사람들이 십리 줄을 섰더란다. 죽솥 옆에는 곤장을 든 사령이 있어서 누구라도 두 번 얻어먹은 놈은 몽둥이로 쳤단다. 다 살아야 하니까 쳐 죽였단다. 어떤 년이 줄을 서 죽 한 그릇을 타 먹었단다. 다 먹고 배부르니까 그때야 등에 업힌 제 새끼가 생각났단다. 제 년 죽 받아먹을 때 뒤에서 머리채를 끄집어 당겼는데, 모르고 제 년 입에만 꾸역꾸역 퍼 넣었단다. 못 먹은 새끼가 울고불고 하니까 줄을 또 섰다가 사령한테 들켜 죽게 되었단다. 그때 그 년이 ‘배고파서 새끼를 잊었소. 난 죽어도 좋으니 매로 치고, 대신 제발 내 새끼 죽 한 그릇만 주시오!’ 했단다. 그랬더니 그냥 놔 주며 한 그릇 더 주더란다.”



‘옛 년’으로 시작했지만 ‘옛 놈’으로 시작했을 때처럼 싱거웠다. 마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가 쓸데없는 말에 쓰는 말인 걸 알게 된 때라, 그저 반갑게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하고 있네!” 했다. 순간 “에라, 이 염병할 놈아!” 할머니가 내 뺨을 쳤다. 아찔하게 얼얼한 한 대, 입안에서 튀어나온 보리알이 마당에 흩어졌다. 30년이 훨씬 지난 일이라 언제 울음을 그쳤는지는 기억에 없다. 그러나 30년이 훨씬 지나도록 그 ‘옛 년’이 내 곁을 떠나지 않는다. 할머니가 직접 봤는지, 본 사람한테 들었는지, 들은 사람한테 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언제나 ‘옛 년’은 아이를 업고 있다.



공연을 마치고 바람 쐬러 남도를 향했다. 보리가 패어 바람에 흔들리고, 식당에서 시킨 비빔밥에서 보리알이 씹힌다. 옛날 내뱉었던 보리알이 또 씻나락처럼 꼼지락거린다. 창밖의 무성한 보리는 이제 사람 대신 소가 먹는다. 세상에서 제일 가파른 언덕 ‘보릿고개’도 이제는 기념사진 각도 나오는 관광지쯤으로 생각한다. 식당에서는 음식물 쓰레기가 한없이 밀려나온다. 이 멀쩡한 세상에서 ‘옛 년’을 생각한 것이다. 할머니는 늘 “귀신은 안 잡아가고 뭐하나?” 했지만, 나 역시 배불리 나이 먹었고 이런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는 것이다. 쓸데없이 또 뺨이 얼얼해진다.



진옥섭 KOUS 예술감독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