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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정여립

중앙일보 2010.05.07 19:31 종합 35면 지면보기
조선 선조 22년(1589년) 기축년 10월 2일, 황해감사 한준이 올린 한 장의 비밀 장계에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정여립이 전라도에서 거병(擧兵)해 한양을 범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것. 삼정승 육판서를 비롯한 온 당상관이 한밤중에 궁으로 소집됐다. 이것이 조선왕조 최대의 참화인 기축옥사의 시작이었다.



‘왕의 남자’의 이준익 감독이 내놓은 신작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임진왜란을 불과 3년 앞두고 벌어진 기축옥사와 그를 둘러싼 동인(東人)-서인(西人) 간의 극한 대립을 냉랭한 눈으로 바라본다. 정여립은 본래 율곡 이이의 제자였지만 뒷날 이이와 성혼 등 서인의 스승들을 공박했다. 집권 동인으로부터는 은근한 비호를 받았지만 서인들에겐 눈의 가시였다.



난을 일으킬 능력도 있었다. 1587년 왜구가 전라도 지방에 침투했을 때 자신이 키워낸 대동계원들을 동원해 부대를 조발했는데 전주부윤 남언경은 서인인데도 “이 사람의 재능은 감히 따를 수 없다”고 감탄했다. 또 평소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며, 누구를 부린들 백성이 아니랴(何事非君 何使非民)’는 얘기를 서슴없이 했고, 대동(大同)을 논하며 반상의 차이 없이 사람들을 대하는 등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언행을 보였다. 결국 옥사가 일어나자 서인인 송강 정철이 조사 책임을 맡았고, 1000여 명에 달하는 명사들이 정여립과 친분이 있었다는 이유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옥사의 여파는 멀고도 길었다. 화를 피한 동인 가운데서도 유성룡과 정인홍은 옥사에 대한 입장 차이로 평생 등을 졌다.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6년 이몽학은 뒤숭숭하던 호남 민심을 부추겨 난을 일으켰고, 의병장 김덕령은 빛나는 전공에도 불구하고 그 패거리로 몰려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이렇게 많은 피를 흘렸지만 정여립의 난 자체가 조작된 사건이란 음모설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서 관객이 재미를 느끼는 이유는 바로 기시감(旣視感)이다. 증거와 판단보다는 “저쪽에서 왜란 난다고 주장하는데, 우리는 안 난다고 해야 할 것 아니야!”라는 대응으로 일관하는 조정, 임진왜란의 발발로 도성을 버리고 달아나는 와중에도 양당이 대립하자 “피란 가는 것도 통일이 안 되느냐!”고 호령하는 선조의 모습. 천안함 같은 일대 사건을 두고도 당리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는 이 판국은 영화가 끝나도 끝나지 않은 듯한 착각을 준다. 



송원섭 JES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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