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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의 세상사 편력] 귀하게 되려면 귀하게 행동하라

중앙일보 2010.05.07 15:42 주말섹션 15면 지면보기
청소년 여러분, 반갑습니다. 여러분께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았는데 이렇게 만날 기회가 생겨 기쁩니다. 잔소리나 늘어놓으려는 게 아니냐고요? 안됐지만 맞습니다. 지겹다고요? 그래도 좀 해야겠습니다. “공부해라.” “그만 자라.” “컴퓨터 꺼라.” 귀에 못 박힌 부모님 잔소리 말고도 지금 듣지 않으면 때늦을 수 있는 잔소리가 또 있는 까닭입니다. 사실 잔소리를 따르면 후회할 일이 생기지 않습니다. 컴퓨터 좀 참고, 잠 좀 덜 자고, 쌍코피 터지도록 공부하면 어찌 좋은 결과가 없겠어요. 좋은 대학, 좋은 직장, 때로는 훌륭한 배우자까지 예약할 수 있습니다. “10분 더 공부하면 마누라 얼굴(남편 직업)이 바뀐다”는 급훈까지 있다면서요.



제 관심은 그 다음입니다. 좋은 대학 나오고 좋은 직장 가져서 여러분이 세상의 주역이 됐을 때, 그때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는 겁니다. 그때 가서 생각하자면 늦을지 모릅니다. 틀에 들어가면 금방 굳는 국화빵 반죽 같은 게 사람의 심성이니까요. 그런데도 많은 부모가 그때를 위한 잔소리는 하지 않습니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 갖는 데 도움이 안 될뿐더러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어서지요.



‘세상사 편력’이란 제목을 감히 붙인 것도 그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인도의 독립영웅 자와할랄 네루의 옥중 서신을 모은 책 『세계사 편력』에서 따왔습니다. 네루는 영국 지배 아래서 학교에 다니는 딸에게 서구 중심에서 벗어난 균형 잡힌 역사관을 심어주길 바랐습니다. 그의 편지 속에는 역사뿐 아니라 사회 지도층이 가져야 할 도덕적 가치들도 녹아 있습니다. 미래의 역사 주역들 마음속에 실천강령을 심어주고자 했던 거지요. 제가 하고 싶은 얘기도 그런 겁니다. 네루만큼 훌륭한 사람은 아니지만 고전조차 논술 대비 다이제스트로 읽어야 하는 오늘의 청소년들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인생 선배의 잔소리라고 생각하고 들어주십시오.



말 나온 김에 사회 지도층의 도덕적 가치에 대해 먼저 얘기할까 합니다. 이른바 ‘노블레스 오블리주’입니다. 높은 사회적 지위에는 걸맞은 높은 도덕성이 따라야 한다는 얘긴데,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흔하게 들리는 만큼 흔하게 실천되고 있지는 않아 보입니다.



사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인간의 역사와 궤를 같이합니다. 동서고금이 따로 없지요. 기원전 21세기를 살았던 우(禹)는 임금이 되기 전 13년이나 치수사업을 하면서 한 번도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직 홍수 잡기에 동분서주하느라 무릎 뼈가 다 달아 다리를 절어야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로마에서도 사회 지도층의 공공봉사와 기부는 의무이자 명예였습니다. 특히 정복 전쟁은 명예를 드높일 기회였기에 귀족들이 자비를 들여가며 경쟁적으로 뛰어들었습니다. 로마 건국 후 500년 동안 원로원의 귀족 수가 15분의 1로 줄어든 것도 전쟁에서 귀족들의 희생이 컸던 탓이란 얘기도 있습니다.



요즘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로댕전에 출품된 ‘칼레의 시민’도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입니다. 백년전쟁 당시 프랑스 도시 칼레는 영국의 포위 공격을 11개월 동안 막아내지만 결국 항복하고 맙니다.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저항의 대가로 시민 대표 6명을 목 매달겠다고 합니다. 모두 눈치만 보고 있을 때 칼레 최고의 부호가 처형을 자청하고 나섭니다. 이어 시장·법률가 같은 지도층이 차례로 동참합니다. 마오쩌둥 주석의 장남 마오안잉(毛岸英)은 신혼 시절이던 1950년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전사했습니다. 그의 시신은 다른 장병들과의 형평성을 고려해 수습을 거부한 마오 주석의 뜻에 따라 여전히 북한의 열사릉에 안치돼 있습니다.



천안함 희생자 명단을 보면서 우리 사회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과연 어떤 수준인지 다시 생각해 본 사람이 저뿐일까요? 고관대작의 자제가 희생자에 포함됐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논리의 비약일진 몰라도 희생 장병들의 사연들은 심심찮게 터져나오는 병역비리 사건들과 중첩되면서 ‘유전면제(有錢免除)’의 불편한 진실이 여전히 우리 사회에 엄존하는 건 아닌지 의심하게 합니다.



국가와 사회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만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아닙니다. 2000명 이상의 졸업생이 양차 대전에 참전했다 희생된 영국 이튼칼리지의 교훈(校訓)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약자를 깔보지 말고 상대를 배려하라. 잘난 체하지 말되 공적인 일에선 용기 있게 나서라.” 이것만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어도 사회 지도층의 마음가짐으로 충분할 것 같네요. 우왕과 마오 주석의 솔선수범, 로마 귀족들의 공공봉사와 칼레 지도층의 희생정신이 곧 그러한 마음가짐에서 출발한 겁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귀하게 되려면 귀하게 행동하라.” 평생 잊지 않길 바랍니다.



이훈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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