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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칼럼] 레이건 “9개 단어로 이뤄진 가장 무서운 말은?”

중앙일보 2010.05.07 15:40 주말섹션 15면 지면보기
2008년에 닥친 금융위기는 ‘변혁의 순간’으로 기록될 것이다. ‘미래의 경제 시스템’에 대해 근원적인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다. 일부 사람들 생각처럼 자본주의의 종언을 말하자는 게 아니다. 여러 나라에서 자본주의가 어떻게 달라질지 짚어보자는 얘기다.



지금 우리는 1980년대에 정부의 역할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이 뒤바뀌는 장면을 목격하고 있다. 잠깐 그 시절로 돌아가보자. 당시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건넨 농담이 있다. “영어에서 9개 단어로 이뤄진 가장 무서운 말이 뭔지 아느냐”는 것이다. ‘나는 공무원인데 도움을 주려고 여기 왔다(I’m from the government and I’m here to help)’는 문구가 답이었다. 금융위기 이후 각국 정부는 레이건의 조롱이 무색할 만큼 금융시장과 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수조원의 달러와 유로·엔·파운드화를 퍼붓고 있다.



시장에 대한 믿음이 훼손되자 정부와 규제에 대한 신뢰는 점점 커지고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유지된 사회적 합의는 정부가 규칙을 만들고 민간 부문은 자유방임으로 놔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정부는 경제에서 적극적 임무를 수행하는 ‘유용한 힘’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정부가 우월한 존재라는 명백한 근거는 부족하다. 오히려 미국 정부가 최근 부동산 시장에 깊숙이 개입하는 것은 능력부족을 잘 드러내는 것이며, 바로 이런 점이 금융위기에 일조했다.



금융위기 이후 혁신 대신 점진적 변화를 원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특히 금융 분야에서 그렇다. 통제 가능한 상황을 원하는 심정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변화는 미래 성장을 갉아먹는 동시에 여러 가지 위험을 몰고 온다.



일러스트: 김동연 kdy@nimbus.co.kr
첫째로 국가가 스스로 과대 팽창한다는 사실이다. 금융위기가 터진 뒤 선진 20개국(G20)의 재정은 만신창이가 됐다. 경제가 되살아나면서 적자폭이 줄게 되자 정부도 이런저런 경제 부양책에서 발을 빼고 있다. 그러나 아직 많은 정책이 잔존해 있다. 비합리적인 것도 많다. 대부분의 국가는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해 부양책을 동원했다. 이 과정에서 쌓인 정부 빚은 결국 국민이 짊어지게 된다.



무엇보다 정부 예산은 금융위기 전부터 한계에 이르렀다. 장부에 찍힌 수치가 현실을 정확하게 말해주지도 않는다. 예를 들어 독일에선 국민에게 지급될 연금 부담액을 감안할 경우 국내총생산(GDP)에 대한 부채 비율이 65%에서 250%로 껑충 뛴다. 금리가 다시 올라가기 시작하면 정부가 지급하는 이자 부담도 꾸준히 늘 수밖에 없다. 재정을 공고히 하기 위한 정치적 노력과 신뢰할 만한 정책이 없다면 국채 이자율이 상승하면서 경제와 정치 모두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둘째 위험은 정부가 기업의 ‘생살여탈권’을 계속 쥐려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비상조치가 필요한 위기의 순간과 시장의 힘이 제대로 작동하는 평시는 분명히 구분돼야 한다. 본디 국가의 대표 기업을 보호하려는 게 정부의 본능이다. 하지만 의사결정이란 것이 반드시 본능에 따라 이뤄져야 하는 건 아니다. 요즘 같은 글로벌 시대에 ‘자국’과 ‘외국’을 구분하는 것은 부적절할뿐더러 먹히지도 않는다.



정부가 산업 구조를 왜곡하지 않으면서 제 역할을 하려면 지침부터 만들어야 한다. 원칙적으로 금융위기 이전부터 골골했던 기업은 지원하지 말아야 한다. 나아가 기업이 안주하지 않도록 지원 규모도 제한해야 한다. 장기적으로 치르게 될 비용도 염두에 둬야 한다. 정부가 시장에 대규모로 개입하면 직접 승자와 패자 기업을 결정하게 된다. 그 결과 시장의 구조적 변화가 늦어지고 산업의 역동성을 해칠 수 있다.



셋째 위험은 정부가 개입할수록 세계 무대에서 멀어진다는 점이다. 다양한 보호주의를 잉태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금융업에서 그런 사례를 자주 봐왔다. 정부 지분이 늘수록 국유화의 위험도 커지곤 했다. 또 정부의 우산 아래 놓인 금융회사는 안방으로 무대를 좁히면서 해외 영업을 축소해 왔다.



정부가 안전판이 구축된 국내 시장을 보고 위안을 느끼는 건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이는 환상일 뿐이다. 금융시장의 탄력을 키우고 위기가 재발하지 않도록 단속하는 유일한 방법은 국제 시장에 맞는 규제의 틀을 구축하는 일이다. 우리는 간섭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인 국가가 미래의 모습이라는 유혹을 거부해야 한다. 그런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면 비즈니스뿐 아니라 사회 전체가 손해를 볼 것이다.



문득 이런 문구가 생각난다.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제공할 만큼 거대한 정부는 거꾸로 모든 것을 빼앗아 갈 만큼 강력하다.”



ⓒ Project Syndicate



요제프 아커만 도이체방크 회장

일러스트: 김동연 kdy@nimb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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