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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편하게 앉아있는 국수가락…마에스트로와 주방장은 같다

중앙일보 2010.05.07 15:26 주말섹션 14면 지면보기
# 시애틀의 꼬마 주방장


j View 정명훈의 ‘음식 교향곡’

지난달 17일 일본 오이타(大分)시의 이치코 대극장. ‘피아노의 여제(女帝)’라 불리는 마르타 아르헤르치와의 협연을 앞두고 도호 음악원 오케스트라의 지휘봉을 잡았다. 차이코프스키 곡에 한참을 빠져들다 보니 벌써 오전 리허설이 끝났다. 기자와의 인터뷰까지 거치니 겨우 30분 짬이 났다. 1평 남짓한 대기실 탁자엔 미니 초밥 도시락과 샌드위치 한 조각이 있다. 점심시간이었다. 이렇게 나흘째 리허설이 이어지면 녹초가 되기 일쑤다. 이럴 때면 즐겨 먹던 매콤한 김치찌개나 파스타 생각이 절로 난다. 집 가까이라면 리허설이 끝나자마자 신나게 달려가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를 했을 텐데…. 세계를 돌며 연주 여행을 밥 먹듯 하다 보니 종종 ‘음식 향수(鄕愁)’에 빠져든다. 어려서부터 요리와 음식을 삶의 커다란 즐거움으로 쳤던 터라 더욱 그렇다.



사실 나는 꼬마 때부터 주방을 넘나들었다. 여덟 살 때(1961년) 부모님이 미국 시애틀로 이민을 갔는데 한국 식당을 하셨다. 그때부터 아버지를 도와 일찌감치 ‘보조 주방장’으로 나섰다. 그때부터 ‘요리가 재미있다’고 생각했고, 오늘까지 할 줄 아는 게 음악 말곤 음식밖에 없다. 학교 다닐 때는 운동도 많이 했지만 결국 다 떨어져 나가고 요리만 곁에 남았다.



# ‘파스타 면발’은 앉아 있어야 제맛



내가 요리에 매력을 느끼는 건 심포니 지휘와 닮은꼴이기 때문이다. 지휘자는 수십 명의 단원을 일사불란하게 지휘해 독특한 음색을 창조한다. 이런 리더십이 요구되긴 요리사도 마찬가지다. 온갖 식재료를 자유자재로 주무르고 조화롭게 다뤄야 천상의 맛을 낸다.



요리건 지휘건 ‘마에스트로(거장)’ 호칭을 들으려면 몇 가지 능력을 보여줘야 한다. 무엇보다 ‘안목’이 필요하다. 훌륭한 지휘자는 실력이 뛰어난 오케스트라 단원을 발굴하는 눈이 있다. 뛰어난 요리사는 싱싱하고 물 좋은 재료를 알아본다. 다음으론 ‘균형’을 맞추는 일이다. 요리할 때 아무리 뛰어난 재료가 눈앞에 있어도 지나치게 짜든가 싱거우면 무용지물이다. 소금 하나만 잘못 써도 전부 망가진다. 오케스트라도 트럼펫을 너무 크게 불든지, 어떤 악기든 아예 희미하게 들리면 안 된다. 악기마다 색깔을 고르게 맞춰야 독특한 전체 음색이 살아난다. 뭔가 특별한 감흥으로 오감(五感)을 자극하는 요리와 연주 뒤엔 늘 이런 ‘균형의 미학’이 숨어 있다.



뛰어난 균형감각은 기초적인 것, 베이직한 일을 잘하는 것에서 나온다고 본다. 내가 좋아하는 파스타만 해도 그렇다. 이탈리아에 살면서 처음 배운 것 중 하나가 ‘파스타 잘 삶기’였다. 처음엔 ‘그것쯤이야’ 했다. 그런데 웬걸.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어떤 사람들은 10분, 5분 이렇게 정확하게 삶는 시간을 재지만, 나는 원체 기계적인 걸 싫어해 감으로 면을 삶곤 했다.



여러 번 실패를 되풀이하자 요령이 생겼다. 눈대중으로도 쫄깃한 식감의 면발을 내게 됐다. 집에서 내가 끓는 물에 면을 넣으면 아이들이 식탁으로 쪼르르 달려온다. 파스타를 먹을 때마다 내가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얘기가 있다. 국수가락 삶은 상태를 사람 자세에 견줘보는 것이다. 면이 너무 삶아져 물렁하면 “이건 누워 있는 파스타”라고 부른다. 덜 삶아져 너무 딱딱하면 “서 있다”고 우스갯소리를 한다. ‘편하게 앉아 있는 국수가락’이 나오면 그날의 요리는 성공이다. 그만큼 기본이 중요하다. 다른 세상사라고 예외는 아닐 것이다.



# 귀를 기울여야 성공한다



내 요리는 ‘막요리’다. 냉장고에 있는 재료를 다 모아놓고 끓이고 볶는 스타일이다. 사실 내 인생이 그렇다. 목표를 딱 세우고 ‘무슨 일이 있어도 하겠다’ 이런 식은 아니었다. 원래 난 지휘자로서도 이상할 정도로 따라가는 걸 좋아했다. 나를 보고 사람들이 “당신은 리더인데 왜 추종자(follower)처럼 행동하느냐”고 묻곤 했다. 열세 살 때 훌륭한 첼리스트인 그레고르 피아티 골스키 앞에서 누나(정명화)의 첼로 연주를 피아노 반주로 도울 때 그가 한마디를 던졌다. “너 혹시 지휘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니.” 그때부터 마음속에 지휘를 담았다. 열다섯 살 때 뉴욕의 음악학교 입학을 위해 오디션을 치렀을 때도 “피아노만 하지 말고 지휘도 하라”는 학장의 말을 곱씹고 따랐다. 훌륭한 ‘조언자’들이 나를 지휘자의 길로 이끌어 준 것이다.



귀를 잘 기울이면 남들을 이끄는 방법도 부드러울 수밖에 없다. 나는 ‘지휘자를 안 따르면 안 된다’는 방식을 무지 싫어한다. 음악적으로 설득을 시키길 원할 뿐이다. 단원들이 “그건 도저히 못 하겠다”고 하면 그대로 놔둔다. 다만 “될 수 있으면 내 얘기를 한번 들어보고 판단해달라”고 말한다. 옛날엔 지휘자라는 게 완전히 독재자 같았는데 지금은 그런 시대가 지났다. 하인(servant)과 같은 마음, 그게 바로 리더와 지도자의 진정한 자질이 아닐까.





J칵테일>>정명훈이 음식 얘기를 하는 까닭은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연주회 마침(오후 10시) → 차로 달려가 옷 갈아입고 귀가 → 서울 구기동 집에 도착(10시40분) → 앞치마부터 두르고 파스타 요리 시작 → 꿀맛 식사(11시)’. 정명훈씨의 습관이란다. 요리에 푹 파묻힌 사내답다. 손수 키운 프랑스 프로방스 집의 올리브로 기름을 짜먹는 남자. 김치찌개 간을 보며 아이들 식탁에 놓을 때 행복하다는 가장. j가 칼럼을 부탁하러 일본에서 만났을 때 그는 요리 얘기만 나오면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7년 전엔 베스트셀러 요리책도 냈다. 소탈하지만 정이 담뿍 담긴 레시피가 주특기다. 장차 아내와 아들 셋, 그들의 반려자까지 포함해 가족 8명이 모두 모인 식탁을 멋지게 차려내는 게 꿈이다.



그는 연주 지휘봉뿐 아니라 요리와 음식으로 세상과 소통하고 싶은 ‘맛있고 멋있는 마에스트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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