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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우석 칼럼] 시·소설 빼곤 ‘잡문’이라니 … 기사·칼럼은 살아있는 문학

중앙일보 2010.05.07 00:56 종합 29면 지면보기
‘말 공장’신문의 문화사 <하>



참 희한한 게 ‘잡문(雜文)’이라는 말이다. 시·소설은 어엿한 자기 이름(서정·서사)을 가졌는데, 나머지는 이름 없는 글, 그래서 이도 저도 아니란다. 누가 이런 황당한 분류를 했을까. 문학하는 이들이 그랬다. 편지·일기, 신문의 기사·칼럼·사설, 그리고 광고카피·논문까지 모두 잡문이라며 도매금으로 처리했다. 이게 맞는 분류일까. 참고로 영어는 우리와 다르다. 문학 이외의 글을 테크니컬 라이팅(technical writing), 즉 실용문으로 분류한다. 글쓰기 교육도 철두철미 이것 위주다.



테크니컬 라이팅은 미사여구 중심의 작문(꾸민 글)과 달리 논리적 뼈대와 정보를 중시한다. 시·소설류보다 압도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실용문의 ‘왕중왕’이 신문기사다. 점점 중시되는 신문활용교육(NIE)도 그 때문이다. 예전부터 신문기사가 어떤 장르인지가 궁금했다. 하지만 답해주는 이가 없었다. 다른 글과 어찌 다르며, 어떻게 발전시킬까에 대한 논의조차 드물었다. 국문학·언론학 모두 놓쳐온 영역이다. 막상 현장에서는 어깨 너머로 익힌다. 그러나 기사란 살아있는 생물이어서 개화기 이래로 스타일·맞춤법이 엄청 변해온 흥미진진한 영역이다.



지난주 소개한 권도홍의 『날씨 좋은 날에 불던 바람』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1950년대 부산에서 살인마 김선경이 체포됐다. 편집기자 조영서는 멋진 신문제목을 뽑았다. “잡혔다 김선경.” 당시에는 모든 신문이 “희대의 살인강도 遂(드디어) 체포”식이던 시절, 패러다임이 바뀐 것이다. 이렇듯 일상에서 숨 쉬는 기사의 글쓰기에 대한 새로운 통찰의 가능성을 보여준 게 국문학자 조동일이다. 그는 오래 전 교술(敎述) 장르라는 말을 선보였다. 이도 저도 아닌 글로 치부돼온 몽유록·야담·경기체가·가사 등에 새 문패를 달아준 것이다.



팩트를 중심으로 대중과 소통하는 글, 시보다 길고 소설보다 짧은 계몽적 성격의 글을 말한다. 그렇다면 신문기사와 사설·칼럼 그리고 광고카피 등이야말로 교술 장르의 으뜸이다. 이런 문패가 왜 중요할까. 신문기사의 번지수를 확인하고, 글쓰기 장르의 ‘호적’을 재정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새 분류는 문학에도 영향을 준다. 사실 그 동안 장르 구분을 주도해온 문학이 저질러온 실수는 시·소설을 과대 포장한 점이다. 그런 문학이 요즘 비틀거린다. 1990년대 이후 ‘문학의 죽음’은 자폐적 글쓰기 탓인지도 모른다.



자폐적 글쓰기, 맞다. 그들의 글쓰기는 번쇄한 문학적 수사(修辭) 남용과 함께 에고(자기)에 갇혀버렸고, 상당 부분 대중과의 소통을 스스로 막고 있기 십상이다. 희망이 있다면 기사·칼럼·광고문 쪽, 즉 현실 속에서 자라난 싱싱한 글이다. 그런데도 신문기자들은 자기 글에 대한 개념 설정을 못해왔다. 그건 ‘말 공장’의 지나친 겸손 탓이다. 재확인하지만 기사·칼럼·사설이란 대중전달을 목적으로 한 글쓰기이자 동시대의 살아있는 문학행위다. 하루 지나면 잊혀지는 글이 결코 아니다. 교술? 아직 낯선 용어다. 쓰다 보면 익숙해지고, 새로운 논의도 생길 것으로 믿는다.



조우석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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