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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홍루몽

중앙일보 2010.05.07 00:25 종합 39면 지면보기
적벽부로 유명한 소동파(蘇東坡)가 노년에 교외를 거닌다. 마침 이를 알아본 노파가 탄식조로 내뱉은 말, “지난날 부귀영화는 한바탕 봄날의 꿈과 같구나!” 필봉을 휘날리던 동파의 얼굴에 내려앉은 세월의 더께, 유유자적한 걸음걸이에서 인생의 참모습을 본 것일까. 송(宋)대의 후청록(侯鯖綠)에서 유래했다는 ‘일장춘몽(一場春夢)’의 한 자락이다.



비슷한 이야기로 당(唐) 시대 이공좌가 지은 ‘남가태수전’이 있다. 순우분이란 사람이 술에 취해 잠이 든다. 꿈속에서 괴안국(槐安國)에 초대돼 왕녀와 결혼하고 남가군(南柯郡)의 태수가 된다. 한껏 호강하다 문득 깨어보니 한 토막 꿈이더란다. 남가일몽(南柯一夢)이다. 같은 시대 심기제의 ‘침중기’도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까지 올랐다가 깬 한단의 노생(盧生) 스토리를 전한다. 한단지몽(邯鄲之夢)이다. 모두 찰나 같은 세상에 덧없는 인생을 비유했다. 장구한 세월이란 것도 알고 보니 선잠 들어 밥이 뜸 드는 시간보다도 짧더라는 얘기다. 이들 ‘꿈 타령’의 원류는 장자(莊子)의 호접몽(胡蝶夢)일 것이다.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다니다 깨어보니 자신이 있더란다. 나비가 나의 꿈을 꾼 것일까, 내가 나비의 꿈을 꾼 것일까. 장자는 현실과 이상,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의 경계를 넘어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를 꿰뚫었다. 동양에서의 꿈은 실존 인식의 경향이 강하다. 꿈에서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반면 서양에서 꿈은 실존 추구다. 킹 목사가 ‘나에게 꿈이 있다’고 외칠 때, 여기엔 현실적 희원이 담겨 있다. 피부 색깔로 차별 받지 않는 세상이다. 성공추구형 ‘아메리칸 드림’ 역시 같은 맥락이다. 이들에게 꿈은 실존적 목표이자 해석과 분석의 대상이다. 꿈은 이처럼 이중적이다. 그래서 피카소는 걸작 ‘꿈’에서 연인 마리 테레즈의 얼굴을 정면과 측면을 합성해 그린다. 현실과 꿈, 보고 있는 모습과 보고 싶은 모습의 혼재(混在)와 몰(沒)경계를 표현한 것이다.



김정일의 방중에 맞춰 베이징에서 피바다 가극단의 홍루몽이 공연됐다. 홍루몽은 청(淸)대의 조설근(曹雪芹)이 지은 소설로, 남경 지역 가(賈)씨 가문의 흥망성쇠를 그렸다. 주제는 여느 ‘몽(夢)류’처럼 ‘일장춘몽’, 그리고 제행(諸行)의 무상(無常)함이다. 그런데 김정일은 이를 알고나 있는 것일까. 꽃피는 5월, 그가 지금 꾸는 꿈도 한낱 봄꿈이자 미망(迷妄)인 것을. 꿈 깨라. 봄날은 간다.



박종권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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