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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서울 뒤안길 … 옛날이 왜 그립지, 걸어가면 금방인데

중앙일보 2010.05.07 00:16 Week& 1면 지면보기
서울은 그동안 너무 바빴다. 근대화·현대화에 이어 이젠 미래도시로 발전하기 위해 옛 풍경을 밀어내고, 그 자리엔 최신식 빌딩이 들어섰다. 사람들도 바빴다. 미래의 비전은 옛 추억을 대신했고, 오래된 것은 낡은 생각들과 함께 털어내야 할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 바쁜 서울살이의 틈새로 문득 젊음을 추억할 때면 그 낡은 옛 풍경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이젠 추억이 되어버린 풍경들. 그런데 아직 60, 70년대의 서울을 간직한 채 그 모습 그대로 살아가는 곳들이 있다. 빌딩숲 뒤 어딘가에 수줍게 숨어 있어 눈에 잘 띄지 않을 뿐이다. 새로 단장한 건물 틈새에서 조용하지만 또렷이 얼굴을 내밀고, 나름의 방식으로 21세기의 서울과 공존하는 40년 전의 서울을 찾아 나섰다.



글=이정봉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금천교시장 안 효자국수집 안재훈(51)씨가 낡은 국수 기계로 면발을 뽑고 있다. 기계는 대물림한 새 주인을 만나서도 탈 없이 아침마다 잘 돌아간다.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2번 출구로 나오면 휴대전화 매장과 파리바게뜨 사잇길이 있다. 이 사잇길로 꼬부라져 들어가면 과거로의 여행이 시작된다. 이 도심 한복판, 시장이 있으리라고는 상상이 안 되는 곳에서 느닷없이 좌판이 벌어진다. 금천교시장이다. 적선시장이라고도 부른다. 끝까지 걸어도 200m밖에 안 될 정도로 아주 작은 시장이다. 길 너비도 5m 남짓으로 좁아 차 한 대도 못 지나간다.



얼핏 보기에는 여느 재래시장처럼 보인다. 한데 여기는 뭔가 좀 다르다. 골목 안쪽으로 조금 들어가면, 검은 판자에 흰 페인트로 쓰인 ‘철물’이라는 손글씨 간판이 나타난다. 이 간판이 새겨진 지 벌써 40년이 넘었단다. 이곳 주인 양동태(68)씨는 이 장소에선 20년 동안 철물점을 했다. 양씨는 “원래 조금 더 아랫동네에 시장이 있었는데 큰 도로가 뚫리면서 이곳으로 옮겨왔다”며 “그 전에 쓰던 이 간판을 가지고 이사 왔다”고 말했다.



철물점에서 약 20m 정도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방앗간이 하나 나온다. 대를 물려서 했다는 이 방앗간엔 옛적 물건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쓰인다. 쌀이나 곡식을 빻아 거르는 체 테두리엔 손때가 묻었다. 바닥에는 모서리가 약간 깨진 무쇠절구통(사진)이 있다. 입구에는 금전출납기가 아닌 ‘돈통’이 놓였다. 모두 나이 마흔을 훌쩍 넘긴 물건들이다. 하지만 어딘가에 내팽개쳐 있는 게 아니라 여전히 ‘현역’이다. 주인 곽종수(53)씨는 “대를 이어 방앗간을 하는데 당시 쓰던 물건을 아직도 쓰고 있는 게 많다”고 했다. 단골들이 깨를 들고 와서 볶고 빻아 달라고 하기도 하고 고추를 들고 와 다듬어 달라기도 한다. 그럴 때 체와 절구통이 제 몫을 한다.



시장 어귀에서 배화여대 쪽으로 걷는 길, 오른편은 체부동이고 왼편은 내자동이다. 길은 동의 경계를 따라 생겼고, 거기서 난 시장은 시대의 경계를 아슬아슬 걷고 있다. 원래 이곳은 사직로를 넓히기 전에는 미군이나 현대 직원들이 자주 찾는 꽤 큰 시장이었다. 이제는 옛 사람이 떠나간 자리에 식당들이 하나 둘 들어섰다. 오랫동안 가게를 열었던 이들도 식당으로 속속 바꾸고 있는 추세다. 그래서 요즘 들어 이곳은 ‘시장’보다 ‘먹자골목’이라고 자주 불린다.



그 속에서도 옛 먹을거리를 파는 집이 아직 있다. 방앗간을 지나 왼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국수 가게가 나온다. 이곳도 50년이 넘은 곳이다. 주인 박정임(77)씨는 아들 안재훈(51)씨와 아침이면 국수를 뽑는다. 나무로 된 틀에 밀가루가 군데군데 묻은 낡은 기계로. 박씨는 “국수는 냉동고에 보관했다가 먹을 때 꺼내서 녹이지 말고 물 끓을 때 그대로 넣으라”는 충고도 잊지 않는다.



골목을 따라 아직 남아 있는 옛 가게에는 동네 주민들이 앉아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눈다. 시장을 찾는 사람들은 손님이라기보다 이웃들이다. 떡볶이 좌판에는 할머니들이 앉아 있고, 근처 페인트 가게에는 아저씨들이 모여 담배를 피운다.



시장은 간판도 달지 않은 식료품 가게에서 끝이 난다. 과일·채소·생선을 파는 작은 가게다. 동네 주민들이 찬거리를 사러 이곳을 들른다. 주인 노한섭(75)씨는 “단골들이 들르는데, 간판이 무슨 필요냐”며 오히려 되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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