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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 딛고 선 기업들 <6> 일진디스플레이

중앙일보 2010.03.25 02:49 경제 2면 지면보기
위기는 기업의 이름이나 번지수를 가리지 않고 찾아온다고 합니다. 많은 기업이 주저앉지만, 바닥에서 탈출해 재기에 성공하는 곳도 있습니다. 여느 기업이라면 쓰러졌을 호된 시련을 극복하고, 성장을 계속하며 일자리를 늘리는 ‘턴어라운드’ 기업들입니다. 본지는 ‘턴어라운드’ 기업들이 어떻게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일어섰는지를 분석하는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실패를 딛고 일어설 힘의 원천을 어디에서 어떻게 찾았는지 최고경영자의 육성을 통해 담아내겠습니다. 또 이들의 성장성에 대한 증권사 애널리스트의 분석도 곁들입니다.


미래 보고 심은 ‘씨앗’ 8년 기다려 결실


“앞으로 사파이어 기판에서 매출 1000억원은 올릴 수 있을 겁니다.”



심임수 일진디스플레이 사장은 지난해 취임 직후 허진규 그룹 회장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그런데 이 회사 사파이어 기판의 전년 매출은 60억원에 불과했다.



0을 하나 더 붙여 잘못 말한 게 아니다. 그는 자신이 있었다.



“LED TV의 시제품을 직접 본 뒤 앞으로 시장의 대세가 될 것을 확신했습니다.”



여기에 생산기술 등 내부 역량도 충분히 뒷받침이 가능하다는 판단도 있었다. 이후 신규 투자가 뒤따랐다. 결과는 금세 나타났다. 지난해 사파이어 기판의 매출은 240억원으로 늘었다. 덕분에 일진디스플레이도 오랜 적자 행진을 마감했다.





시장은 변덕스럽다. 각광받던 상품과 기술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일이 숱하게 벌어진다. 특히 정보기술(IT)산업은 눈이 휙휙 돌아갈 정도로 변화의 속도가 빠르다. 투자에 따르는 위험이나 경영자의 부담도 그만큼 크다. 심사장도 이를 잘 안다.



“능력 있는 경영자가 운 좋은 경영자 못 따라간다는 의미로 ‘운칠복삼’(運七福三)이란 말이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니겠어요.”



그렇다고 투자를 하지 않다간 결실을 기대할 수 없다. 설혹 당장 실패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씨앗’을 뿌려놓으면 시차를 두고 결실로 돌아온다.



일진디스플레이가 그랬다. 애초 공업용 합성 다이아몬드 생산업체인 일진다이아몬드의 한 사업부서(결정성장사업부)에서 출발했다. 이 사업부는 2000년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휴대전화 단말기의 필터를 만드는 소재인 리튬탄탈레이트(LT) 기판을 개발했다. 이어 2002년에는 유기발광다이오드(LED) 칩을 만드는 기초소재인 사파이어 기판을 개발했다. ‘안정적이지만 성장성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던 일진그룹엔 기업 규모를 한 단계 도약시킬 ‘신수종 사업’이었다. 2004년에는 일진다이아몬드에서 분할돼 본격적인 사업에 들어갔다.



하지만 사업은 순탄하지 못했다. 예상만큼 시장 수요가 빠르게 따라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진디스플레이는 다시 휴대전화 화면을 투사해 확대해서 볼 수 있는 프로젝션용 싱글LCD라는 제품을 내놨다. 하지만 이도 결국 상용화되지 못했다. 회사의 매출은 항상 제자리였고, 막대한 투자와 개발비용으로 적자는 쌓이고 쌓였다. 결국 LT기판과 싱글LCD 사업은 2008년 접어야 했다.



그렇다고 모두 망가진 것은 아니었다. 절반의 실패였다. LT기판을 생산하던 충북 음성의 공장에서는 턴어라운드의 주역이 된 사파이어 기판을 생산하고 있다. LED TV가 선풍을 일으키면서 요즘 없어 못 판다는 제품이다. 원소재(잉곳)를 얇게 잘라 가공하는 과정은 LT 기판이나 사파이어 기판이나 다 같다. 당시의 생산기술과 설비가 고스란히 신제품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시장의 급성장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었던 것도 과거 지속적인 투자와 기술개발로 내부 역량이 갖춰져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적자에 놀라 조기에 철수했다면 ‘단맛’을 볼 기회도 놓쳤을 것이란 얘기다.



일진디스플레이는 차세대 먹을거리로 터치패널을 선택했다. 경기도 평택 본사에 있는 터치패널 생산라인에서 방진복을 입은 직원들이 제품을 살펴 보고 있다. [김성룡 기자]
싱글LCD 생산을 위해 지은 평택 공장도 새로운 ‘미래 먹을거리’ 준비에 활용되고 있다. 스마트폰에 쓰이는 터치패널이 그것이다. 일진디스플레이는 적자가 한창 나던 2008년 터치패널 업체를 합병해 시장 진출의 기반을 만들어 놨다. 올 하반기부터는 대기업 납품이 시작되며 매출을 끌어올릴 ‘효자’가 될 것이란 게 회사 측의 기대다.



지난해 이후 일진디스플레이에서는 신규 투자와 함께 인력 충원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극적인 반전에 증권사 애널리스트들의 발길도 잦아졌다. 희망의 빛이 보이자 회사 내부도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최철영 경영지원실 부장은 “적자가 누적되고 숱한 직원이 회사를 떠나면서 조직 내 불신과 패배의식이 팽배했지만 최근 실적이 빠르게 개선되면서 팀 간에 협업하는 문화가 생긴 게 내부적으론 가장 큰 변화”라고 말했다.



하지만 시장의 기류가 또 어떻게 변할지, 언제 다시 위기가 닥칠지 모른다는 게 문제다. 심 사장이 긴장의 고삐를 늦추지 못하는 이유다.



“아직 정상화 과정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훅 불면 날아갈 수 있는 상황입니다.”



특히 빠르게 변하는 시장 환경에 맞춰 투자의 방향과 타이밍을 잡는 건 여전히 일진디스플레이에 남겨진 숙제다. 사파이어 기판 시장이 활황을 보이면서 시장 진입을 준비하는 기업도 하나둘 생겨나고 있다. 심 사장은 “살아남기 위해서는 시장의 작은 변화도 놓쳐서는 안 된다”며 “그러기 위해선 전 직원이 온 몸의 촉각을 시장에 맞춰놓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글=조민근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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