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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문법 잘 몰라서 더 잘 써졌다는 이 아이디어맨

중앙일보 2010.03.25 00:56 종합 27면 지면보기
드라마 ‘추노’에서 파워 넘치는 연기를 온몸으로 보여준 장혁. [KBS 제공]
한국 사극의 문법을 바꿨다는 평을 듣는 KBS2 드라마 ‘추노’가 25일 막을 내린다. 도망노비를 중심으로 조선 후기 저잣거리 인생을 생동감 있게 그려내 ‘웰메이드 민초사극’으로 불렸다. 최종 원고를 털고 난 뒤 “많은 분들이 예상했던 대로 용두사미로 끝났다”고 너스레 떠는 천성일(39) 작가를 서울 논현동 영화사 ‘하리마오 픽쳐스’ 사무실에서 만났다. 천 작가는 “무대 뒤의 사람으로 족하다”며 끝내 사진 촬영을 사양했다.


오늘 종영 ‘추노’ 천성일 작가

◆드라마 문법 몰랐기에 새 도전=서스펜스 추격전으로 시작한 ‘추노’는 멜로·정치·액션을 폭넓게 담아내며 매니어층을 빨아들였다. 천 작가는 “드라마 문법을 몰랐기 때문에 새롭다는 소릴 듣는 것 같다”고 겸손해했다. 그래도 “비슷비슷한 드라마들 속에서 이제까지 없던 재미를 주고 싶었다”는 속내를 감추진 않았다. 특히 동갑내기 곽정환 감독과 만나면서 “실패하진 않겠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했다. 실제로 곽 PD의 빼어난 영상 테크닉은 ‘명대사’보다 ‘명장면’으로 작품을 기억하게 만든다. “곽 PD와 앞으로 같이하고 싶은 작품을 5개쯤 얘기했다”고 한다.



병자호란 직후를 배경으로 한 ‘추노’엔 이른바 풍운의 영웅이 없다. “한바탕 뒤집을 수 있는 기반을 가지고도 어쩌질 못하는 주인공들이 답답했겠지만, 처음부터 그렇게 의도했다”는 것. “각자 자기가 속한 집단을 대표하면서도 벗어나지 못하는, 그럼에도 시대와 정치 속에서 얽히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래서 ‘추노’는 끝까지 노비당·정계·추노꾼의 세 축을 한데 묶지 않는다. “작품이 희망을 말하는지, 비극을 말하는지는 마지막 장면을 통해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글발’보다 아이디어맨=이과(물리학 전공) 출신의 천 작가는 영화 마케팅으로 입문했다. 10여 년 일하다가 영화사를 차렸는데, “작가를 고용할 돈이 없어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영화 ‘7급 공무원’ ‘원스 어폰 어 타임’ 등에서 대중성을 확인했다. 스스로는 “타고난 ‘글발’이라기보다 숱한 시나리오 검토와 기획회의를 통해 다져진 노하우 덕분”이라고 했다. “글을 위해 글을 쓰는 게 아니라 제작을 염두에 두니까 완성도뿐 아니라 대중성에 맞추는 감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래도 ‘추노’의 감칠 맛 나는 대사는 작가의 내공을 짐작하게 한다. 좌의정과 김진사 등 양반들의 문자속에 더해 길바닥 민초들의 ‘속담열전’은 비장한 극 분위기에 해학미를 더했다. 배우들이 애드리브로 살려낸 것도 적지 않다고. 특히 마의 역의 윤문식은 “미꾸라지 짝짓기하는 소리하고 있네” 같은 맛깔 나는 대사를 현장에서 만들었단다. ‘추노’가 재발견한 배우인 장혁에 대해서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단어 순서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캐릭터와 분위기를 살렸다. ‘평생 너랑 함께 살 거다’를 ‘평생 함께 살 거다, 너랑’ 하는 식으로.”



‘추노’를 통해 하고 싶었던 얘기를 극중 대사를 통해 들려달라고 하자, 외계어 같은 사자성어를 일삼던 김진사의 대사를 인용했다. “노잠작견 진금부도(老蠶作繭, 眞金不鍍)”. ‘늙은 누에가 고치를 만든다/ 진짜 금은 도금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란다. 이 대사가 몇 회 어느 장면에 나오는 지 기억하시는 분은 e-메일을 보내주시길.



강혜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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