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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춘당의 추억

중앙일보 2010.03.25 00:39 종합 33면 지면보기
지난 23일 국립국악원에서 춘당(春堂) 김수악(金壽岳, 1926∼2009) 1주기 추모공연이 있었다. 예부터 “북 평양 남 진주”라 했다. 그 남쪽의 풍류 본향 진주의 마지막 예기(藝妓), “남강 물은 말라도 애란(춘당의 예명)이 주머니는 마르지 않는다”는 명기(名妓)였다.



솔직히, 몹시 까다로운 분이었다. 공연을 약속한 다음 날부터 오전에 비행기 예약하라 하고 오후엔 취소하라 했다. 공연 날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오뉴월 보리단술 변하듯 획획 변했다. 그럼에도 판을 벌인 것은, 판에만 서면 도저히 볼 수 없는 광경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팔순 노구를 이끌고 나오는 몇 걸음이야 힘겹다. 그러나 악사들의 선율이 마중을 나오면 저절로 둥둥 떴다. 춤은 ‘탈 것’처럼 시원스러운 것이었고, 올라서면 탈속(脫俗)의 세계가 펼쳐졌다. 온몸을 통 털어 허공에 그리는 춤, 그렇게 이내 자취 없이 사라질 하룻밤의 꿈을 꾸몄다. 저 티베트 고원의 승려들이 쌀이나 돌가루로 그렸다가 쓸어버리는 단 한 번을 위한 치장, 만다라(曼茶羅) 같았다. 만다라는 산스크리트어로 원(圓)이란 뜻이다. 원은 속을 비워야 원이 되는 법, 그렇지 못하면 단지 점(點)일 뿐이다. 선생의 춤은 스스로 텅 비우며 원을 그려가고 있었다.



추모 춤판에는 제자들이 춘당의 춤을 추었다. 그중 ‘교방굿거리춤’은 춘당이 녹음한 구음(口音)에 맞추어 추었다. “나니나 나리룻…” 다른 악기 없이 장구와 목소리로만 반주하는 것인데, 객석의 몸치도 몸 둘 바를 모르게 하는 춤을 부르는 소리였다. 순간, 춤은 남겼지만 구음은 챙겨 떠나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춘당의 구음은 여느 판소리꾼의 탁성과 달리 서슬 푸른 청음이 섞여 있다. 예기(藝妓) 학습 때 가곡과 시조를 탄탄히 배운 때문이다. 그리고 스스로 소리꾼이기에 선율은 판소리의 구절양장 같은 길을 간다. 거기에 연주자이기에 가야금·아쟁의 선율을 얹고, 춤꾼이기에 발밑에 절실한 박의 징검다리를 놓는 것이다. 한마디로 가무악(歌舞樂)이 한 몸에서 발효되어 저절로 “얼씨구!”란 기포를 터트리며 익어버린 소리다. 결국 국창으로 불리던 김소희 명창도 “구음만큼은 김수악이 강산의 제일”이라 했고, 사람들은 춘당의 구음이면 “헛간의 도리깨도 춤을 춘다”고 했다.



춘당의 구음으로 큰 제자들이 무용계의 기둥이 되었다. 무용계에서는 이들을 두고 ‘개천의 용’이라 부른다. 춘당의 제자로 개천예술제 무용경연에서 수상하고 무용계에 등용했다는 뜻의 입담이다. 춤은 그 용들의 품에 담겼지만, 그 용을 운무 박차게 한 구음은 결국 후계 없이 고사한 것이다.



춘당 1주기 추모공연. ‘벌써 일 년’이라기보다 ‘아직 일 년’밖에 안 된 것인가 생각한다. 가신 지 족히 10년은 넘은 듯도 싶다. 지난해만 해도 전설과 같이 있었던 것이 오히려 믿어지지 않는 거다. 그만큼 옛 방식을 학습한 옛 분이었다. 그분의 춤은 옮겨 담았지만, 춤을 부르는 최고의 구음은 쏟아버렸다. 대륙에서 자욱한 황사가 몰려왔고, 추억도 먼 시간에서 아득히 밀려왔다. 뒤풀이에 동석하면 흩어질까 봐 홀로 주막에 앉았다. 하필 주막집 술이 짰는지 아침 내내 물만 찾았다.



진옥섭 KOUS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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